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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드리운 그림자

by Jee

이사한 다음 날 새벽, 도시의 가로등이 집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여자의 얕은 잠을 깨뜨렸다. 잠은 달걀 껍데기가 깨어지듯 갈라졌다. 의식이 잠껍질을 깨고 흘러나와 베개를 적셨다. 여자는 몽롱하게 잠과 깸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말끔하고 단호하게 깨버렸다. 다시 자기는 글렀네. 새벽의 검푸른 배경 속에 가로등 빛을 받아 회색벽이 형태를 드러냈고, 키 큰 화분의 잎사귀가 회색 늑대털 같은 거친 그림자를 벽에 드리웠다. 붉은 밸벳 소파 위 고양이가 고개를 파묻고 자고 있었다. 밤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밝으면서도, 여전히 한밤중이라는 것을 절감할 만큼 두툼했다. 여자는 테라스로 향한 유리문을 열고 고양이 곁으로 다가갔다. 밤 그림자 사이의 밝은 부분을 딛고, 붉은 소파를 건너, 거실 바닥에 몸을 늬였다.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가 다가와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옆구리를 파고든 고양이가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낼 때마다 여자는 깊이 안도했다. 여자가 뒤척이면 고양이도 조응하듯 몸을 진동시켜 가르릉거리다가, 금방 깊은 잠에 빠져 콧바람을 뿜었다. 여자는 거실바닥의 따뜻함과 딱딱함을 등으로 느끼며 잠을 청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밤이 드리운 그림자는 슬리브 아래 드러난 여자의 허벅지와 장딴지를 덮었다. 물속에서 올려다볼 때처럼 세상이 어른어른했다. 시폰커튼처럼 반투명하게 세상을 덮은 그림자는 거실과, 여자와, 고양이를 얇은 막으로 감싸 안았다. 새벽이 끝날 때까지 언뜻언뜻 파도처럼 잠이 찾아왔다가 물러가는 걸 느끼며 여자는 생각했다. 오늘은 다행이네.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독한 술을 반컵 마시고 쓰린 속을 문지르며 일어나야 했으니 말이다.


다음 날, 주문한 커튼이 도착했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린 침실은 사방이 어둠뿐이었다. 그 밤을 지나 새벽, 여자는 다크 초콜릿처럼 찐득한 어둠을 헤치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더듬어 실내화를 찾아 신고 화장실을 가다, 방바닥에 놓여있던 명상 방석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도, 회색 늑대 같은 키 큰 나무 화분 그림자도, 방을 훔쳐보는 고양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을 지나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검은 방은 실제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상상하며 방의 크기를 가늠해보려고 했다. 침대에 누우니 깊은 어둠이 이불처럼 여자의 몸을 덮었지만 여자는 선뜻 다시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깜깜한 침실이 깊은 잠을 선사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커튼을 치고서부터 오히려 여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새벽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검은 방이, 밤이라는 사실 또는 잠을 자야 한다는 의무를 상징하는 것 같아서였을까, 3-4시간을 뒤척이다 결국 항복하고 거실로 나오면, 고양이를 옆구리에 끼고서야, 여자는 2-3시간이나마 새우잠에 들었다. 공기의 압력이 너무 높은 탓이다. 색깔의 밀도가 너무 높은 탓이다. 커튼을 바라보며 여자는 중얼거렸다. 이 검은 방의 공기는 너무 무거웠다.


여자는 커튼을 아주 조금 열었다. 밤이 드리운 그림자가 벽에 얕게 번졌다. 여자는 한참 동안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사 왔던 날의 밤이 떠올랐다. 빛과 어둠이 섞여 있었고, 어쩌면 그게 더 편안했던 게 아닐까. 완전한 어둠이라는 건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을지도 몰라, 여자는 생각했다. 아직은 이 곳이 낯설어, 낮의 수선스러움이, 밝음이 밤에도 여전히 조금은 남아있기를 원했다. 여자는 창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날카롭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이 다시 방안을 비추었다. 불빛은 다시 고양이를, 화분을, 벽을 어릿한 그림자로 되살려 냈다. 밤이 드리운 그림자가 낮동안 생명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듯이, 잠을 되돌려주고, 여자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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