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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퀼라이저

by Jee

트랜퀼라이저는 인류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엄청 좋은 일은 아닐지 몰라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통과의례랄까, 아무튼 요즘은 트랜퀼라이저 시술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네? 아,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물속에 잠긴 것 같달까,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사회적 신뢰? 그걸 위해 하는 거죠. 우울증 걸린 교사가 초등학생 살해하고, 무차별로 인도를 차로 들이받아서 사람이 죽고…. 그런 일들이 실제로 발생하니까요. 그렇죠. 적어도 나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런 표시인 거죠. 그래도 싫다면요? 아니 뭐…. 그럼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야죠. 콘돔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예민한 사람들은 그걸 못 받아들이나 봐요. 느낌은 떨어지지만 안전한, 그런 거요.

저는 트랜퀼라이저 시술을 받은 지 2년쯤 됐어요. 저랑 남편이랑, 처음엔 안 받으려고 무지 노력을 했었어요. 집에 텔레비전도 없애고, SNS도 안 하고요. 해만 떨어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나고, 스님처럼요 하하. … 나쁘지 않았어요. 적어도 저는 그 정도로도 “잡음”을 견딜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은 아니었어요. 원래도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기도 했고, 어차피 잡음이라는 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생계를 위해서는 사회생활을 해야 되고, 사람을 아예 안 만날 수도 없고, 이미 이 세상이 “잡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집안에만 있다고 피할 수는 없으니까… 남편이 한동안 침대에서 못일어날정도로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남편이랑 같이 센터에 갔죠.

예전에는 알약 형태였다고 들었어요. 아뇨, 저는 먹어본 적은 없어요. … 옆에서 보기엔 굉장히 원시적인 방식이랄까, 무차별적으로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거니까, 효율이 좋지는 않았다고,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잡음”의 진폭이 이렇게 크지 않았을 때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잡음”의 파장이 너무 강력하고 불규칙하니까, 웬만한 사람의 신경은 견디질 못하죠. 극단적인 주장만 알고리즘을 타고 증폭되니까, 양극단값이 점점 더 강해지고요. 지진해일이 웬만한 건 다 삼켜버리듯이.


은희는 녹음 파일을 재생하면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용돈벌이 겸 시작했던 잡지 인터뷰 기고가 이제는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개인적인 흥미가 있어 더 집중했다. 돔(해저도시)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트랜퀼라이저 시술이 필수였다. 하지만 은희는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고 몇 번이고 약을 끊으려고 시도했었다. 매번 실패로 돌아갔지만. 내 정신으로 살고 싶어. 약을 먹으면 모든 게 흐릿하고 뭉툭해져. 그 느낌이 싫었다. 약을 끊었다가 오랜만에 다시 복용하면 약기운이 내 정신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신경이 놀라 펄쩍 뛰고 열감이 목덜미를 타고 솟구쳤다. 내 신경과 약물이 옥신각신을 하다 보면 어느새 팔다리에 힘이 쫙 빠져 드러누웠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면 약물이 신경계를 장악하고 의기양양하게 도취한 것을 저절로 알았다. 그럴 때마다 은희는 가슴깊이 모멸감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인터뷰이의 남편이 나 자신마저 속이는 트랜퀼라이저 시술의 정교함에 대해 말했을 때 은희는 솔깃했다.

트랜퀼라이저를 시술하면 약물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트랜퀼라이저도 약이긴 약인데, 나노 기술로 신경에 정교하게 작용하니까, 약을 먹는 줄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을 끊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들죠. 특별히 행복하다는 느낌은 없어도, 우울하거나 불안한 것도 없으니까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단약의 충동이 사라진 게 좋아요.

은희는 인터뷰이 남편의 답변이 잡지에 실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은희의 개인적 질문에 대한 개인적 대답이라고. 그럼 트랜퀼라이저에 다른 부작용은 없나요? 어지럽다던가, 무기력해진다던가, 졸린다던가 하는 거요. 돔 입주 서류 마감기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트랜퀼라이저 시술 증명서도 필요서류 중 하나였다. 트랜퀼라이저가 정말 괜찮을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부작용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은희는 가만히 기다렸다. 식욕이 왕성해져요. 식욕이요? 네. 트랜퀼라이저가 몸 내부에서 뭔가 에너지를 많이 쓰나 봐요. 금방 배가 고파지고 당이 떨어지고, 제때 식사를 안 하면 하늘이 노래질 만큼 다급해져요. 그래서 시간 맞춰서 꼭 뭔가를 먹는데, 미각은 좀 둔해져 있거든요. 그래서 맛은 잘 못 느끼는데, 먹기는 먹어야 하니까, 그게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죠. 식사를 할 때마다 생각하거든요. 내 몸 안에 뭔가가 있긴 있구나.


며칠 후, 은희는 센터 앞에서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수중호흡 센터와 가까운 곳에 있는 트랜퀼라이저 센터는 돌로 이루어진 반듯한 형태였다. 유리나 콘크리트를 더 이상 예전처럼 대량 생산하지 않는 세상에서 건축은 다시 돌과 나무로 돌아갔다. 센터는 깨끗하고, 차가워 보였다. 자동문이 조용히 열리며 은은한 아로마 향이 흘러나왔다. 내부는 병원 같기도 하고, 호텔 같기도 했다. 환한 조명이 그림자 하나 없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직원들은 하얀 실내복을 입고 조용히 움직였다. 창구에 앉아 서류를 제출하자, 리셉션 직원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트랜퀼라이저 시술은 안전하고 정밀합니다.

안내를 따라 안쪽 복도로 걸어가며 은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발걸음 소리가 돌벽에 부딪혀서 둔탁하게 울렸다. 벽면에는 추상적인 자연 풍경이 디지털 패널 위로 흐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감정이 깎여나간 공간 같았다. 시술실은 온통 하얀색으로 통일된 작은 방이었다. 창문은 없었고, 벽 한쪽엔 '편안한 삶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음각되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직원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눈을 감으시고, 편하게 숨 쉬세요.

날카로운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순간, 짧은 따끔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장이었다.

하얀 천장. 깨어났다는 것을 인지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마치 깊은 잠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정신이 맑지도 흐리지도 않았다. … 이게 전부인가? 은희가 두려웠던 것은 나라는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라는 감각을 유지하면서 정신병과 싸울 때마다 느끼던 좌절감, 단약 후 다시 약을 복용할 때 느꼈던 모순 같은 감각을 평생 느끼면서 사는 것이 더 두려웠었다. 시술 후 은희가 두려워하던 것이 모두 사라졌다. 나라는 감각도, 나라는 모순도.

은희는 며칠 동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뭔가 달라지면 알아챌 수 있도록, 혼자 있을 때도 살금살금 움직였다. 하지만 거울을 보니 여전히 똑같은 얼굴이었고, 손을 움직여 보아도 특별한 감각은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을 뒤져봤다. 불안한 감정이 있는지, 후회가 있는지. 아니면 기쁨이 있는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커피를 내렸고, 컴퓨터를 켜고, 인터뷰 원고를 정리했다. 집중력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감각이 흐려지지도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무덤덤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먼지와 쓰레기를 몰아가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작은 움직임에도 감정이 동했을 것이다. 괜히 서글픈 기분이 들거나, 죽음과 소멸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바람이 부네. 그뿐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음식을 씹었지만, 미각은 둔했다. 배가 고프니 먹었고, 트랜퀼라이저가 요구하는 것 같아 먹었다. 만족할 만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크게 불평하지도 않았다. 밤이 되자,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을 텐데, 이제는 고요했다. 이 세상의 "잡음"도, 내면의 "잡음"도 소거되어 있었다. TV를 켰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고요해서 다시 리모컨을 확인할 때처럼, 은희는 그 고요함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며 은희는 마지막으로 물속을 생각했다. 물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듯이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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