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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온 눈

by Jee

아침 11시쯤 창밖으로 눈이 펄펄 내릴 때, 여자는 일기를 쓰고 있었다. 환한 대낮에 눈이 펄펄 내리는구나. 눈송이는 긴 직사각형 창을 무대 삼아, 펄펄, 폴폴, 이 쪽 코너에서 저 쪽 코너로 폴카 추듯 살랑여서, 방안이 따뜻한 무도회장 같았다. 점심으로 뜨거운 수프를 훌훌 넘기고 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이 쨍하다. 한 꺼풀 더 쌓인 눈이 햇빛을 되쏜다. 오후의 창은 내내 휘황하게 밝았다. 눈이 부셔 두꺼운 커튼을 쳤다.


다음 날, 10시쯤 종종걸음으로 커피를 사러 나갔다. 창밖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아주 가느다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뽀드득 눈을 밟았다. 폭신하게 쌓인 눈은, 밀가루 포대를 엎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내장을 감싼 지방층처럼 뭉근해 보이기도 했다. 미세한 눈송이가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쓴 정수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번 겨울은 눈이 자주 내려 우산 없이 눈을 맞은 적이 많았는데도, 이 날은 전에 없이 한기가 느껴졌다. 하찮을 만큼 가느다란 눈송이가 왜 이렇게 깊은 냉기를 품고 있는 걸까?


창밖은 하루종일 안갯속에 묻혀 있었다. 하얗고 두꺼운 장막을 뚫고 아주 가끔씩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하루 밤 사이 바깥공기 온도가 급강하한 것 같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아파트 벽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 작은 한기 덩어리가 느껴졌다. 손톱만 한 한기는 짧은 순간 가슴 언저리를 지나 윗 팔 뼈를 건드렸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차가운 덩어리는 냉정한 느낌을 남기고 몸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언제쯤이면 이 겨울이 끝날까? 지루했다.


다음 날은 오랜만에 맑았다. 청소부들이 한 곳으로 밀어놓은 눈덩이가 딱딱하게 굳어있다. 여자는 발로 눈을 툭툭 건드렸다. 군데군데 먼지가 검게 묻고, 고집스럽게 딱딱해진 눈, 순결했던 한 순간을 지나, 녹아 없어지는 것만이 구원이 되어 견디고 있는 눈덩이. 눈은 때로는 나긋나긋한 손님처럼, 때로는 진격하는 군대처럼 내려오지만, 영광의 하강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바닥에서 버려졌다. 눈은 내리는 것이 사명이고, 추위와 습기가 함께할 때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다음 날 포근한 날씨에 길거리의 눈이 사라졌다. 이사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여자는 두꺼운 스웨터는 더워서 얇은 면티로 갈아입고,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였다. 신도시와 구도심을 잇는 다리를 넘어갈 때, 눈부신 햇빛이 차량 앞유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고양이는 뒷좌석에서 야옹거리며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듯했다. 조수석의 남자는 무기력해 보였다. 불안 또는 우울과 싸우고 있을 것인데, 굳이 캐묻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오늘은 불안이고, 내일은 우울이다. 약을 먹으면 예기불안과 싸우고, 약을 끊으면 우울과 싸운다. 여자는 지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운전대를 꼭 붙잡았다.


눈송이 하나하나는 아주 가볍고 눈부실만큼 하얗다. 눈송이가 땅으로 내려와 쌓일 때, 시간이라는 무게가 눈송이를 짓누르면 그것은 돌처럼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무엇인가가 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순수하고 여린 상태에서 복잡하고 딱딱한 상태로 변화시킨다. 겨울이 계속될 동안,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고,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아 낙심하게 된다. 하지만 곧 햇빛이 비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녹고, 녹은 눈은 물이 되어 다시 하늘로, 바다로 흘러들어 순환을 시작한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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