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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의 재발견 Jul 29. 2016

청춘의 집

청춘이 깃들은 나의 집

2004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는 서울의 새 집에 들어왔다. 8평 남짓의 서울의 오피스텔이었고, 대학교 근처라 친척이 얻어준 집이었다. 내 나이 24살이었고, 이윤열, 홍진호, 임요한이 나오는 스타리그에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커피프린스에 설레 하며, 밤늦은 시간 좋아하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고.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면서 미드를 공부하기도 했다. 월드컵을 세번을 보냈고, 사랑하는 사람을 세 번을 떠나보냈다. 항상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기도 했지만, 8평의 작은 공간을 거쳐간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다.


그렇게 이 공간에서 나의 청춘을 온전히 보냈다.



2005년쯤인가. 한 겨울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스터디의 여자애가 있었는데. 고시원에 혼자 살고 있었다.

유난히 성숙한 아이였고 대화가 참 잘 통했던 친구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시원 보일러가 고장 났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추워서 힘들다고. 무슨 생각인지 몰랐지만, 그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고. 나는 방바닥에서 그 친구는 침대 위에서. 쩔쩔 끓는 보일러 온기 속에서 신기할 정도로 편안하게 밤새도록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예전 사랑부터 나의 현재의 어리숙함까지. 그리고 별 일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 친구는 고맙다며 다음 날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줬다. 보일러 열기보다 더 보글보글 끓던 그 빨간 국물이 아직도 또렷하다.


2006년은 스타리그에 열광하던 때였다.

작은 집이었지만 TV가 있었고, 학교가 끝나면 오자마자 온 스타리그를 틀었다. 임요한, 홍진호, 강민, 이윤열 등 당시의 스타리그 프로게이머의 경기는 모두 잊지 않고 챙겨봤다. TV를 놓칠 때면 곰플레이어를 켜서 지난 방송도 챙겨봤다. 라면에 계란을 동동 올려서 호호 불면서 보는 스타리그 생방송은 정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오덕 같은 시절이었다. 특히 임요한과 홍진호의 3 연속 벙커 러시 결승 생방은 내 생애 가장 놀라운 광경 중 하나였다. 박정석의 셔틀 천지 스톰 플레이며, 신예 박성준의 저글링 컨트롤은 물량 중심의 이윤열과 최연성의 시절을 바꿔버렸다. 밖에서야 도서관을 가고 친구를 만나고 술을 퍼붓던 시절이었겠지만, 나의 공간에서만은 스타리그였다. 단연코


2008년 이별이 찾아오다.

이별은 보통 밖에서 하지 않나. 길거리에서 서로의 뺨을 때리며 매몰차게 헤어지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기도 하고. 나는 집에서 헤어졌다. 그 순간이 가끔 사진처럼 떠오른다. 4년을 만난 여자 친구였는데, 이 작디작은 8평짜리 집에서 이별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별은 일주일 전에 했지만, 집으로 찾아온 여자 친구에게. 이 추억이 서려있는 공간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이별을 고했다. 밤늦은 시간이었고. 그녀가 설거지 해주던 그릇도 그대로 놓여있었고, 같이 과제를 하던 앉은뱅이책상도 그대로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침대 위에 올곧이 앉아 이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고 문이 닫히던 순간. 명치 언저리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고. 살며시 닫히던 문소리에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느껴지기도 했다.


2009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다.

사랑과 이별은 같은 호르몬이 분출된다고 한다. 도파민.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를 수 없는 이 상태에 우리는 간혹 미친 짓을 한다. 2008년 이별 후 나는 얼마 간 폐인처럼 지냈고, 2009년 새로운 사랑을 찾은 후 다른 미친놈이 되어 있었다. 방 한쪽 벽을 그녀의 사진으로 도배를 해놓고 방을 한가운데를 가르는 줄을 이어, 빨래집게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 놓았다. 스토커의 본거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새 침구류가 생겼고, 방 안에는 피죤 냄새가 났고, 앉은뱅이 책상은 버려졌다. 5년 만에 식물이란 걸 재배하기 시작했고, 말도 안 되게 토마토가 열렸다. 토마토가 영그는 순간. 우리가 함께 만든 첫 생명체라며 카메라에 담았다. 여자가 해주는 미역국을 먹었고, 나는 네이버를 보고 파스타를 만들어주었다. 그때처럼 햇살이 쨍하게 방 안을 비추던 때가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듯하다.


2012년 퇴근 후 맥주

취미가 생겼다. 퇴근 후 카프리를 마시고 나면, 창 틀에 열을 맞춰 세워놓는 거다. 창문 밖으로 내부순환도로가 놓여 있어서 각양각색의 불빛이 집안을 비춘다. 노란 달빛, 흰색 헤드라이트, 빨간색 브레이크등, 오렌지색 가로등. 그럼 투명한 카프리병이 그 색깔을 온전히 담아 스스로 빛을 냈다. 누구나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공허함이 있을 거다. '이 일이 맞는 건지. 이 길이 내 길인지.' 그럴 때 저 빈병들을 보면서 감상에 젖었던 거 같다. 아직은 내 감성이 말랑말랑 하단 걸 발악하며 뽐내듯이. 빔 프로젝트를 천장에 쏴서 누워서 영화를 봤다. 저렴하게 구해온 스피커와 연결해서 영화 한 편을 보면 나의 하루가 씻기듯 행복했다. 그때 봤던 영화들은 순수함을 노래하는 청설 같은 대만 영화들도 있었고, 허세의 끝을 달리던 아비정전 같은 영화도 있었다. 순수함은 나의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은 발악이었고, 허세는 직장인이 되었으니 저런 짓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일그러진 욕망이었으리라. 그때는 혼자인 게 좋았고 혼자를 즐겼다. 장국영의 아비정전을 몇 번이고 보고 나면 잠이 잘 왔다


2014 년 별 일 없이 산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 이미 웬만한 건 다 해봤다. 요리도, 허세질도, 오덕질도, 연애의 도파민도. 그때쯤이었다. 퇴근하고 을지로 5가를 갔다. 상아색 페인트와 붓을 샀다. 저녁 8시에 집 안의 가구들을 다 밖으로 빼기 시작했다. 내 키보다 큰 책장, 내 어깨보다 3배는 넓은 책상, 어설프게 조립된 이케아 침대. 그것들을 2시간에 걸쳐 문 밖으로 옮기고 미친놈처럼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살았던 터라 벽지가 누랬는데 그게 맘에 안 들었나 보다. 그래도 미술을 전공할 뻔한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페인트 칠을 해갔다. 흰 티셔츠와 콧잔등에 페인트가 묻고 발가락이 노랗게 될 때쯤, 내 안의 예술혼에(허세를) 감탄하며 또 감탄했다. 4시간 넘게 페인트칠을 하고 새벽에 나와서 담배를 한대 폈다. 그때의 상쾌함과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페인트 냄새에 취해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정신병자 같은 노란색 방에서 정장을 갈아입고 출근을 했다.


2016년 이 방을 떠나다.

내 인생에서 격변기를 3개만 뽑으라면, 90년 대 부모님의 이혼과 2000년 대의 군대, 그리고 2016년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준비했고, 파혼을 했다. 회사에 사표를 던졌고, 다시 빌면서 봐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집을 12년 만에 떠나게 됐다. 비록 신혼집으로 가는 건 아니지만. 수많은 정이 묻어 있는 이 공간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더 살면 아마 1년 뒤에 모든 가구와 물건을 다 버리고 이불 하나만 덮고 생활하지 않을까 싶은. 그렇게 이 공간을 떠난다. 나의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모든 감정이 주체 없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또 숨죽여 멈춰있던.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가능하면 이 동네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다. 나의 정들었던 이 공간에 대한 추억은 이 글이면 충분하다. 이제는 훌훌 털고 떠날 때가 된 거 같다. 새로운 시작은 다 버리고 나서야 가능하니까.


내 나이 50. 혹은 70에 이 공간을 다시 본다면, 사무치게 그리울까. 아님 살포시 웃음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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