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간의 재발견 Nov 05. 2020

마음에 부는 바람

쉬운 연애를 디톡스하다


사랑을 하다. 그 말의 재정의


2020년은 모든 면에서 속도가 빠르다. 가끔 그 속도에 압도되어 내 삶의 쉼표를 모른 채 사는 때도 많다. 항상 열심히 보고 듣는데 내면은 공허할 때가 있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듣기 때문은 아닐까. 하루 24시간 중 off 하고 나를 보고 듣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아니 시간의 양이 중요치 않을수도 있다. 순간이라도 충만했는가.


영화 '마음에 부는 바람'은 어쩌면 비현실적인 작품이다. 어떻게 23년 간 그 마음을 온전히 담고 살 수가 있는가. 창고에서 비를 피하던 중 료스케는 갑자기 뛰어나가 데이지 꽃 한송이를 꺽어온다. 순간 '저게 가능하다고?' 라 생각했다. 23년 전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선물한 데이지 꽃을 기억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꽃을 선물하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싶었다. 분명 20년 전에는 클리셰일 수 있는 장면이 2020년 지금 나에게 무척 낯설었다. 언제부터 낭만적인 연애가 낯설게 느껴진걸까.


 








여자와 남자의 첫 만남이 우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그 우연의 끈이 이어져 서로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고, 감정이 깊어진다. 다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또 다른 한번의 우연을 기다리며 간절해보기도 하고. 같은 자리에서 몇날 며칠을 기다려보기도 한다. 상대방의 일상을 알게 되어도 조심스러워 몇 개월 넘게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하는 그런 날들도 있다. 페이스북도, 인스타그램도, 카카오톡도 없었던 시절. 우연이 반복되면 혹여라도 반가운 사이가 될까 묵묵히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애태운 감정은 나날이 깊어지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좋아할까. 그 답을 내릴 수 없지만, 마냥 기다려지는 사람. 그렇게 첫 연애가 시작된다.


쉽게 얻으면 쉽게 잃는다. 이 말은 언제나 진리라 생각한다. 세상이 편리해진만큼 우리는 소비와 속도에 익숙해졌다. 꼭 이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대안은 많으니까. 그렇게 재고 다른 선택지를 고르다보면 어느 순간 지치게 된다. 나에게 있어 '전진'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 자신을 포기하기보단 상대를 포기한다. 줄다리기를 하다 한 쪽이 놓으면 쏠리는 게 아니라 동시에 놓는다. 그래서 전진이 없다. 그래서 사랑을 해도 기억을 못한다. 사귀기 전의 떨림이나 기다림, 언제 손은 처음 잡았는지, 그가 혹은 그녀가 내게 한 첫 대답은 뭐였는지. 요즘에도 '그래서 너희는 언제 처음 손을 잡았어?'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만큼 영화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 비현실감이 이상하지만 아련하다.










영화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23년 간 첫사랑을 기다려온 우직하고 순수한 남자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어' 라고 말한 료스케가 낯설었다. 23년 만에 재회를 하고, 하루를 친구처럼 옛 추억을 회상하며 여행은 할 수 있다. 결혼을 했고 성인이 된 딸이 있어도 하루의 일탈은 가능하니깐. 그런데 료스케가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기에, 마지막 하루를 더 만나자고 한다. 당연히 가정이 있는 하루카는 거절하고. 요즘 남자라면 쿨하게. 그래. 그럼 인스타로 연락하자. 혹은 카톡으로 연락하자. 로 이어질텐데. 그렇다면 이런 로맨스도 없었겠지만. 료스케는 하루카가 올 때까지 마지막으로 만났던 언덕에서 기다린다. 분명 클리셰가 맞는데. 이상했다.




찌질함과 힙함의 사이


찌질하다. 힙하다. 이 극명하게 반대편에 서있는 요즘 말의 프레임은 강력하다. 힙력이 있는 사람은 인정 받고 인싸가 되고. 찌질한 행동은 찌질함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종 SNS 상에서 마녀사냥을 당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누군가의 평가와 잣대에 스스로를 검열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그걸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 '찌질함' 과 '힙함'이다. 영화에서 료스케와 하루카의 대화를 보면, 료스케는 찌질했고 전혀 힙하지 않았다.


(내용은 비슷하나 대사는 다름)


"내일 여기를 떠나는데 하루 더 만날 수 있을까?"

"미안. 내일은 봉사활동이 있어."

"그럼 끝나고 만나. 내가 기다릴게"

"아니. 오늘까지만 보자. 오랜만에 너무 행복했고, 설레였어. 고마워"

"그럼 내 연락처를 줄게.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어"

"아니. 받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그렇게 여자가 차에서 내려 떠나고, 남자는 떠나는 여자를 보며 말한다. 내일 여기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좀 민망한 대사였다. 그런데 그 민망하다는 말은 종종 한다. 뭐하기 민망해서. 뭐하기는 좀 애매해서. 뭐하기는 아닌 것 같아서. 사람들은 한 발을 빼놓은 상태의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하고. 그 기저에는 쪽팔리기 싫은, 손해보기 싫은 심리가 있다. 모두가 말을 똑부러지게 잘하고 논리도 탄탄한데. 진전이 없다. 나를 희생하고 상대를 받아들이고. 찌질함을 넘는 용기를 내고. 계산하지 않는 무모함에 사람은 감동하기에. 그렇게 하루카는 무작정 기다리는 료스케를 그 언덕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영화의 1/3을 차지하는 23년 전의 추억팔이가 아닌 지금의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을 하다' 라는 말의 정의는 뭘까. 연애는 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상대보다 내가 더 중요한 건 어쩌면 다치기 싫고, 찌질해지기 싫은 겁쟁이의 다른 모습은 아닐지. 그렇게 찌질했던 료스케 덕분에 하루카는 평생 잊지 못할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짧고 충만했던 하루 만으로.


최근 누군가에게 찌질했던 적이 있는가. 비참함을 각오하고 감정에 충실했던 적이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스마트하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나 자신부터 반성해본다.











#마음에부는바람 #요즘연애 #윤석호감독 #윤스칼라 #아날로그감성 #로맨스영화추천 #멜로영화추천 #디톡스

작가의 이전글 집, 나만의 공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