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해야 살 수 있나요?
혼자 일하는 프리워커의 자유와 치열함, 게으름을 독자분들께 보고합니다.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지금쯤 대리를 달았으려나. 제 능력이 출중해서 고속 승진했을 수도 있습니다.
1인 디자인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직원인 저는 상사가 없어 평가받지 않고 동료가 없어 경쟁하지 않습니다. 직업으로서,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잘 성장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보고서는 스스로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한 기록물입니다. 이번 한 주도 좋다가 슬프고, 화내다 이내 기뻐하며 살았네요.
한 주간 안녕하셨나요?
이번 주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유독 많이 했습니다. 저녁 6시만 되면 상점 조명이 일제히 꺼지던 유럽의 거리를 떠올리면서요. 한 주 동안 모든 사람들이 제게 '최대한 빨리'를 외치더군요. 영어로 ASAP. 저는 이 표현이 지구에서 없어지길 바랍니다.
‘최대한 빨리요. 내일 당장이요. 오늘 중으로 바로요.’ 이런 요구들엔 ‘최고의 퀄리티는 아니어도 된다. 눈살 찌푸리지 않을 정도의 디자인으로 일이 굴러가게만 하면 오케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깊이 고민하고 작업할 시간이 없으니 당연히 퀄리티가 높지 않습니다.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지 못한다는 짙은 아쉬움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애초에 재촉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회사 내의 불필요한 보고 체계 근절! 미리미리 조직 문화 구축! 하지만 절대 안 됨. 그럴 수 없음.
현실은 최대한 빨리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6시가 훌쩍 넘은 늦은 밤까지 일했습니다.
대게 규모 있는 조직의 윗분들 결정이 촉박하게 떨어져 담당 직원분이 저를 급하게 찾습니다. 직원분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지만 ‘죄송해요 디자이너님ㅠㅠ’을 연신 말합니다. 시키는 대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직원분께 뭐라 할 수 없습니다. 힘드시겠어요. 우리 다 참 힘들게 사네요. 직장 다녔을 때 제 모습과 다르지 않아 이해하면서도 다른 일을 제쳐둔 상황에 짜증이 납니다.
제가 제쳐둔 중요한 일 두 가지는 서체 디자인과 글쓰기입니다. 이 지점에 괴로움과 자괴감이 듭니다.
서체 디자이너이지만 서체를 만들 시간이 없습니다. 사무실 월세 내고 생계를 이어가려면 들어오는 일들을 해야만 합니다. 그 일들은 대부분 급합니다. 그러면 급하게 의뢰하는 일은 안 중요하냐? 아니요. 모든 일은 다 중요합니다. 거래처의 일들 또한 누군가의 생계, 인생이 걸린 일이니 당연히 중요합니다. 서체 디자인과 글쓰기는 제게 중요함을 넘어 재미와 희열을 주는 일입니다. 하지만 서체는 당장 돈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 개의 서체를 런칭하려면 작업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은 단숨에 써지지 않고, 당장 책 낼 게 아니니 돈이 안됩니다. 또한 이 일들은 클라이언트 워크가 아닌 혼자하는 작업이라 마감 기한이 없습니다. 바쁘면 서체 디자인 작업을 미루고 글을 안 씁니다. 계속 바빠서 계속 미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미루고 있습니다. 이러다 인생이 다 밀리겠어요.
내게 일을 믿고 맡겨주는 거래처가 있다는 감사함과 꾸준히 수입을 번다는 안도감. 급하게 일하면 좋은 퀄리티가 나오지 않는 아쉬움. 하고 싶은 작업이 계속 밀린다는 답답함. 클라이언트가 우선이고 내 일을 그다음이라는 안타까움. 여러 복잡한 감정에 늘 괴롭습니다.
모든 걸 다 할 수 없는 걸까. 왜 하루는 24시간뿐이지. 야망을 굽히고 싶지 않은데. 조바심에 마음이 급해집니다. 결국 내 괴로움은 빨리 많은 서체를 만들고 싶고 빨리 많은 글을 쓰고 싶은 조급함 때문이 아닌가. 인생을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고 싶은 재촉이 괴로움을 더 크게 만드네요.
빨라도 안전 주행할 수 있습니다. 운전대는 제가 쥐고 있는데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안 잡힙니다. 그래도 되도록 걷고 싶습니다. 느리게 오래 걷고 싶어요.
왜 우린 급하게 살아가는 걸까요? 정말 급해야 살 수 있나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한 주를 돌아 봅니다.
한 브랜드와 서로의 속도와 호흡을 챙기며 살뜰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빨라야 할 땐 빠르게, 느려져야 할 땐 느리게 함께 고민하면서요. 이런 의뢰는 보통 대표님들이 직접 저를 컨택한 경우고 일하면서도 대표님과 직접 소통합니다. 제 경험상 디자인 퀄리티는 조직의 규모가 작을수록 높은 편입니다. 무난하고 두루뭉술 디자인이 아닌 날렵한 디자인이 나옵니다. 수장 또는 최종 컨펌자와 직접 대화하며 일하기에 소통의 질이 상당히 높습니다. 어떤 방향의 브랜딩을 원하는지, 다른 브랜드들과 차별점은 무엇인지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분들이니까요. 그들의 고민을 직접 들으며 의견을 함께 나누니 디자인이 딴 길로 샐리가 없습니다.
독특한 서체를 좋아하는 대표님과 취향이 통했고, 다움웍스의 주력 분야인 BI 디자인이었기에 더 자신 있었습니다. 조건과 환경, 서로의 온도가 적절하게 스미는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쉽지 않은데, 감사히 만났네요. 얼른 이 브랜드가 세상에 공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G사 브랜딩 패키지, 명함 시안 송부
S사 월간 리뷰 인쇄 발주
SY사 리플렛 표지 시안 송부
N사 SNS 콘텐츠 디자인 컨펌, 업로드
H사 이벤트 페이지, 배너 베리에이션 송부
공예 교육 프로젝트 서류 송부
Written by 보령다움 5호 편지 출력
완독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 오병곤, 홍승완
독서 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창가에 서서 비 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직원에게 책상에 앉아 일하던 동료 직원이 ‘밖에 비 와요?’하고 물었더니 ‘예, 비 오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으니 ‘같다’를 남용하는 현상은 문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도 ‘같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김정선
의견 표출에 여지를 주는 ‘같다’. 원래 ‘같다’를 잘 쓰지 않았는데 요새는 일부러 씁니다. 확실하게 말하기 애매한 상황에서 ‘같다’는 기분 나쁘지 않게 회피하는 수단‘같습니다’. 그래서 난 뭐 같다?
그러려니 하는 자세 가지기(이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공예 수업 샘플링
이번 주 진행하던 일 마무리 잘하기
Written by 보령다움 5호 편지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