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Apr 14. 2023

도보 앞 1층에 생애 첫 개인 작업실이 생겼다.

가난이 만든 감각

땅에 발붙이고 사는 발바닥의 감각, 눈높이로 세상을 보는 수평의 감각은 30년의 경험으로 몸에 깊이 스몄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지금껏 연식이 최소 20년은 지난 다세대 빌라의 지층이나 2층에 주로 살았다. 신축 건물은 우리 식구의 이사 고려 대상에 낄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10개 남짓의 계단을 내려가면 금방 바깥과 통하는 곳이 우리 식구의 보금자리였다. 집안은 좁았지만 넓은 집 밖 세상이 모두 내 것인 자유 속에 살았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에 살아본 적은 평생의 딱 한 번, 재건축을 앞둔 복도식 아파트 4층 전세 집이었다. 그나마도 답답해 계단으로 걸어 다녔다. 엘리베이터는 땅으로부터 수직으로 나를 떠올렸고 몸이 붕 뜨면 정신도 붕 뜨는 것 같았다.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는 느낌, 금방 추락할 것 같은 불안함이 일었다. 꾹꾹, 발바닥으로 지면을 눌러 걸어야 안전함을 느꼈다.


안전함, 편안함을 느끼는 지점은 온전히 내 주관적인 감각이다. 흔히 “느낌이 그래”라고 말하는 촉이다. 그 감각은 사람마다 경험에 따라 다르다. 모든 감각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내 평생의 저층 살이가 차곡차곡 몸에 배였다. 가난은 지면으로부터 붕 뜨고 싶지 않은 몸의 감각을 만들었다. 가난이 징글징글했지만 결국 나를 만든 건 가난이다.


내 생애 첫 개인 작업실은 나다운 곳에 자리했다. 서울의 한적한 동네, 재개발이 안된 최고 높이 3층짜리 오래된 건물이 2차선 차도를 따라 늘어선 거리의 낡은 2층짜리 건물 1층에 작업실을 얻었다. 건물은 한때 유행한 타일 외관을 둘렀고 오랜 세월에 타일은 누렇게 바랬다. 도로에서 보이는 건물 앞면만 흰 페인트를 칠했고 건물의 양옆과 뒷면은 누런 타일이 그대로다. 어떻게든 깨끗해 보이려고 애쓰는 어정쩡한 생김새가 어이없고도 귀여웠다.

간판은 구청에서 달아줬다.

이곳은 구청에서 청년에게 공간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개방감과 수평감, 땅에 발붙이고 사는 감각을 가진 내 몸과 정신이 먼저 반응했다. 후줄근해서 친근한 이 건물은 8평 남짓의 남향이고, 층고가 3m로 훤했다. 숨이 탁 트이는 개방감, 하루 종일 빛이 내리쬐는 따뜻함, 내가 찾아 헤매던 곳이었다. 구청에서 이미 기본적인 실내 인테리어도 해둔 상태였다. 실내는 레몬 한 방울이 들어간 크림 화이트 컬러의 페인트를 칠했고, 비닐도 안 뜯은 새하얀 싱크대가 반짝이고 있었다. 천장에는 갤러리에서 사용하는 레일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내 취향을 저격했다. 오래된 동네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세와 주차장이 없고 관리를 안 해줘서 관리비가 없는 장점까지 있었다. 또한 구청의 지원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입주할 수 있었다. 단숨에 꽂혔다. 내가 원하던 공간이다. 여기 너무 가지고 싶다. 저절로 욕심이 났다.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이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햇살 맛집 남향 작업실

유일한 부담은 도보와 맞닿은 전면이 통유리인 1층이라는 점이었다. 이거 뚫려도 너무 뻥 뚫렸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작업실로 쏟아진다. ‘여기는 대체 뭐 하는 곳이지?’ 호기심에 사람들이 유리에 얼굴을 밀착하고 내부를 들여다본다. 남향집에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블라인드를 달았지만 가장 가리고 싶은 건 사람의 시선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일말의 틈도 용납해선 안 된다. 늘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꾹 내렸다. 차마 블라인드를 올릴 용기가 없었다. 아직 사람들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블라인드를 꾹 내리고 살았다.

수년 전의 나는 모든 것에 거리낌 없었다. 웬만한 사람과 상황도 경계하지 않았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는 짧은 찰나에 사장님과 일상을 나눴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며 아르바이트생과 피곤을 나눴다. 처음 간 식당의 이모님과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며 시국을 나눴다.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무슨 말을 꺼낼까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이제는 카페, 편의점, 식당 어디를 가도 필요한 말만 최소한으로 한다. 이거 주세요. 얼마죠. 감사합니다. (퇴장) 오히려 무인 마트와 키오스크가 편하다.


사람을 피해 벽을 세우고 그 벽 뒤에 숨었다. 벽 뒤에서 오롯이 혼자가 되어 진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밖으로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벽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황급히 숙였다. 아냐, 아직은 아니야. 바깥으로 나가길 주저하던 시기에 도보 앞 1층 작업실에 덜컥 놓아졌다. 어쩌면 장소가 나를 도우려고 제 발로 찾아온 걸까. 마음의 벽을 투명한 유리로 바꾸는 변화의 시작, 잃어버린 이타심을 회복하는 공간.


나는 다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