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이상하다면 잘하고 있다는 의미
세리프(Serif)란 서체의 획 끝에 꼬리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 나는 세리프를 서체의 눈꼬리, 입꼬리라고 생각한다. 세리프의 높낮이, 각도와 모양에 따라 서체의 표정이 달라진다. 서체디자이너로서 세리프는 다양한 변주를 만들고 싶은 대상이다. 세리프가 조금만 달라져도 서체의 목소리 톤이 달라져 비트는 재미가 상당하다.
캐슬론(Caslon)과 타임즈 뉴 로만(Times New Roman)은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를 가져 신문과 책 본문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디도(Didot)와 같이 세리프의 두께가 일정하고 획과 직각으로 떨어지며 강한 대비를 이루는 서체는 우아한 인상을 준다. 패션지, 미술관 등의 매체에 많이 사용된다.
또한 굵고 각진 세리프를 슬랩 세리프라고 한다. 슬랩 세리프 서체들은 강한 인상을 주어 산업혁명 시기에 광고로 많이 사용되었다.
산세리프(Sans Serif)의 산(sans)은 프랑스어로 ‘~없이’를 뜻한다. 따라서 산세리프는 세리프가 없는 서체를 말한다. 최초의 산세리프 서체는 1816년 윌리엄 캐슬론 주조소의 책에 등장한 이집션이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며 산세리프는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서체가 되며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리프체의 긴 역사와 비교했을 때 산세리프체는 태어난 지 불과 20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생아이다.
서체에 당연하게 붙어있던 세리프가 덥석 사라지니 당시 사람들은 많이 당황스러웠나 보다. 산세리프체를 처음 본 사람들은 기괴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초기에 산세리프체는 그로테스크(Grotesgue) 라고 불렸다. 산세리프가 당시에 얼마나 이상했으면 이름을 그로테스크라고까지 했을까.
헬베티카(Helvetica), 유니버스(Universe), 에어이얼(Arial)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들이 산세리프 서체이다. 2022년 현재 산세리프체를 기괴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감히 생각하건대 없을 것이다. 간판에도 산세리프, 스마트폰 UI, UX도 산세리프, 유튜브에도 산세리프, 세상천지가 산세리프체다. 오히려 이 모든 산세리프체들을 세리프체로 바꾼다면 과거로 돌아간 듯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세리프의 삭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기괴한 인상을 주고 놀라게 했지만 산세리프체는 현재 우리의 일상에 녹아든 서체가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심하지 못한 세리프를 잘라냈을 때 세상을 바꾸고 나를 바꿀 수 있다.
이제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나대로 충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습관이 된 경쟁은 단숨에 없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남들을 비교하며 질투했고, 내 성장을 비하했다. 경쟁이라는 세리프를 조금씩 지우고 있는 중이지만 기어코 나는 흐릿하게 남은 자국을 따라 세리프를 선명히 다시 그린다. 경쟁에 자주 되돌아갈 때마다 슬펐다. 경쟁에게조차 지고 있는 나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경쟁과 경쟁하고 있는 꼴이었다.
경쟁이 아닌 나의 꿈과 행복을 목적으로 삼았더니 이제 그 꿈과 행복에 집착했다. 꿈을 더 빨리 이루고 싶고, 더 많이 행복하고 싶었다. 깊이는 때론 지나침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는다. 잘하고 있음에도 더 잘하려는 완벽주의는 내게 갈급함을 더한다. 결점 없는 사람 없고, 완벽한 날이 없는 게 인생인데 무결점의 삶을 바랐다. 내 꿈과 행복에 작은 티끌 하나가 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던 방식을 한 번에 버리긴 쉽지 않다. 성적 순위로 우등생과 열등생이 나누어지는 경쟁을 어렸을 때부터 하며 살아온 K-학생으로서, 경쟁 사회의 한복판을 지나는 젊은이로서 경쟁은 뾰족한 세리프로 내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완전히 경쟁을 잊고 나답게 잘 산 것 같은 날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사랑한 날에는 기쁘면서 불안하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이러다 뒤쳐지는 거 아닐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치고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하니까 불안한 자신이 이상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시 생각을 고친다. 지금의 내가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새로워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니 마음껏 기괴해도 좋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나에게 훼방의 속삭임을 건다.
예전에 착하던 너 어디 갔어.
변했어.
이기적이야.
어디서 토를 달아.
이전과 달라진 내 모습에 이상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아주 잘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안심한다. 세리프를 잘라내고 그로테스크라고 불린 것처럼 모든 새로움엔 이상함이 따라온다. 나는 현재 세리프를 지우고 아주 예쁘고 나다운 산세리프 서체를 만들고 있다. 나라는 산세리프체가 어떻게 생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지만 분명 나답게 잘생겼을거다. 낯섦을 반기고 기괴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나라는 산세리프체를 만들기에 조금 불편하고 때론 이상한 지금의 나를 충분히 더 사랑해 주려 한다. 나의 내일은 어떤 글씨로 써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