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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Jul 14. 2024

메디아 루나 - 오쵸 7

마음이 급할수록 행운은 항상 인간을 비껴간다. 약속 시간에 늦은 덕에 급하게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는 한 층에 오래 머물다 내려왔고, 지하철은 내가 오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듯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떠나버렸다. 그렇게 겨우겨우 수업 시간에 맞춰 강습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문을 열자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끼리끼리 연습 중이었다. 누구 하나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중에는 엘리아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아나는 루크와 함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루크의 리드에 따라 엘리아나는 배웠던 동작들을 복습하고 있었다. 그의 리드가 안정적인 것인지 표정이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탱고 경력이 벌서 2년 차가 되었다는 루크였기에 확실히 나보다 동작들이 깔끔하고 모양새가 좋았다. 더욱이 내가 모르는 동작들도 섞어서 리드를 하기에 춤이 다채로워 보일 뿐만 아니라 재밌어 보였고, 엘리아나의 입가에 떠나지 않는 미소가 그 사실을 방증하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낄 곳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짐을 내려놓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준비를 마친 후 구석에서 그들의 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춤이 끝났고 그제야 그녀는 날 발견했는지 내 쪽을 보고 웃으며 눈으로 인사했다. 나도 인사를 받으며 살며시 그녀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루크와 그녀는 서로 즐거웠다고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자 루크가 반갑게 나를 맞아줬다.

 

"어서 와요, 데이.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데이빗이 늦게 오는 바람에 제가 엘리아나 님하고 연습하고 말았잖아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의 웃음을 보며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요. 없는 동안 이렇게 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는 엘리아나 님만 알려주시지 말고 저도 좀 알려주세요. 확실히 로는 로에게 배워야 하잖아요?"

짜증을 참고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어휴, 저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요. 같이 열심히 배워가는 거죠. 궁금한 게 있으시면 최선을 다해 알려드릴 테지만, 너무 그렇게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기하더니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될 것 같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 엘리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기다렸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한 번도 안 늦었던 사람이 늦으니까 걱정했잖아요."

그녀의 웃음에 조금은 섭섭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렸냐며 걱정 어 질문들을 하며 땀을 닦아줬다. 그녀의 모습에 괜한 생각으로 짜증을 낸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어디 하나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하루였기에 의지할 곳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함께 연습하는 상대가 사라진다면 큰 상실감이 올 것 같았다.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에게 일 때문에 조금 늦었다고 답했다. 몇 가지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고 하는데, 밀러가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사람들이 플로어로 모였고 수업이 시작됐다.


"자, 오늘은 오쵸(ocho)를 배워볼 겁니다. 오쵸는 탱고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작이니 집중해서 들어주세요."

밀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집중하기 시작하는 것 같자 조이가 이어서 말했다.


"혹시, 오쵸의 뜻을 아는 사람 있을까요? 의미를 알면 그 동작의 본질을 더 잘 알 수 있어요. 본질을 알면 그 의미에 맞게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겠죠? 오쵸의 의미를 아시는 분?"

조이가 수강생들을 둘러보며 질문했고,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거나 그녀의 눈을 피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딴 곳을 보는 척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크게 대답했다. 루크였다.


"오쵸는 숫자 팔이란 의미죠. 스페인어로 팔을 의미하는데 팔(8) 자 모양을 그리며 스텝을 밟는다고 해서, 오쵸라 한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네요."

루크가 조이를 보고 싱글거리며 답했다. 마치 어린애가 나 잘했지 하며 묻는 것 같은 모양새라 보기고 좋지 않았다. 조이는 루크를 잠깐 바라보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오쵸는 스페인어로 팔(8)이란 의미예요. 마치 숫자 팔과 같은 모양으로 스텝을 밟아서 오쵸라고 하고, 탱고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스중 하나입니다. 오쵸는 앞으로 하는 오쵸와 뒤로 하는 오쵸가 있는데, 리드와 상화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활용되니 탱고를 배우려면 꼭 알아야 하는 스이에요. 오쵸에서 중요한 건 무엇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형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맞아요, 조이 선생님의 말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게 정말 중요해요. 자 보세요. 이렇게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옆으로 스텝을 밟습니다. 스텝을 밟으면 서로를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꼬임이 생기는데 그 꼬임을 통해서 회전이 일어납니다. 그 회전을 이용해서 팔(8) 자 모양의 스을 그려주는 거죠."

밀러가 조이를 불러 서로 마주 잡은 뒤 오쵸의 시범을 보였다. 밀러의 리드에 자연스럽게 바닥에 닿은 조이의 발이 작게 회전하며 팔자 모양의 스탭을 그렸다. 따라오는 발끝이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중요한 건 상대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겁니다. 오쵸를 한다고 해서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거나 상대를 지나치면 안 됩니다. 자, 그럼 한 번 해볼까요. 파트너끼리 잡아봅시다."

밀러의 말에 사람들은 옆에 있는 사람과 아브라소를 하며 서로서로 마주 잡았다. 사람들이 파트너를 찾아가는데 멀리 이동하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루크가 어떤 여성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언뜻 살펴보니 키가 크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루크가 찐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아브라소를 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엘리아나와 아브라소를 했다.


그녀와 마주 잡은 상태에서 선생님들이 알려주신 동작들을 시도해 봤다. 그녀를 방향에 맞게 돌려주며 옆으로 스텝을 밟았다. 안내하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딘가 알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리드하고 있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움직임이 조금은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회전이 더뎌지고 있었다.


"엘리아나님 회전이 약하신 거 같아요. 조금 더 회전에 힘을 실어보시겠어요?"

그녀가 잘 돌지 못하니 리드를 하는데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조금 더 힘을 주려 노력했다. 그녀 스스로는 힘든 것 같아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조금은 힘을 더 해 그녀를 돌려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이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힘으로 잡아당기는 건 리드가 아니에요. 부드럽게 안내를 해줘야죠. 팔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프레임을 가지고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겁니다. 힘으로 하는 건 강압적인 방식이고 상대방에게도 예의가 아닙니다. 대화할 때 자기 할 말만 하거나, 강압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사람하고 대화하고 싶을까요? 상대방을 좀 배려하세요."

그 말을 뒤로 조이는 바로 다음 수강생들을 점검해 주기 위해 움직였다. 조이의 말에 약간의 가시가 느껴져서 기분이 언짢았다. 엘리아나는 괜찮다며 자신도 신경 써보겠다고 말했다. 그녀를 보며 감정을 가라앉히고 동작에 집중했다. 집중해서 뭔가를 좀 해보려 할 때 밀러가 파트너를 바꿔주세요,라고 말하며 수업을 진행시켰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상대에게 가서 인사했다. 밀러 강의가 이어졌다.


"탱고는 항상 상대를 바라보는 방향성을 가지고 추는 춤입니다. 상대가 없다면 춤이 완성되지 않아요. 몇몇 분들을 보니 춤에 자신만 있지 상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상대가 어디에 발을 밟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춤이 어그러질 겁니다. 탱고도 결국 소셜 댄스입니다. 사람 관계랑 비슷해요, 연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연인 어떤가요? 마찬가지입니다. 춤을 출 때도 항상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해요."


문득 연인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자윤이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의 방향성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아니지 우리란 말이 무색했다. 우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 나는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 끝까지 마주 보려 노력하는 이 순간들이 마치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연습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만큼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아브라소를 하려는 엘리아나를 살짝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음 상대와 나도 아브라소를 했다. 마찬가지로 오쵸는 잘 되지 않았다. 상대는 엘리아나보다 더 힘을 주지 못했고, 나도 상대에게 관심이 없으니 굳이 억지로 모양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작이 잘 되지 않았기에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집중해서 동작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밀러가 다가와 말했다.


"처음부터 너무 뭘 만드려고 하지 마시고, 연습한다 생각하고 일단 해보세요. 동작의 디테일은 나중에 잡아도 좋으니 지금은 서로를 느끼면서 동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익혀보는 게 좋아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다 연습이고 과정이지. 하다보면 늘게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다정한 말에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뭔가 지나갔다. 그런 모습이 창피하여 조용히 그 감정을 삼켰다. 감정이 올라왔음을 숨기 채 수업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런 중에도 엘리아나가 계속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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