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심하게 떨렸다. 잘못한 걸 인지해서인지, 다시 파트너십을 이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더 떨려왔다. 자리를 정리하고 홍대로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하여 어디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녀가 이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곳으로 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이번 출구로 올라가는 내내 어떤 말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지 고민했다. 도착하니 그녀가 방긋 웃으면 인사했다. 그녀의 웃음에 우습게도 안심했다. 그녀는 배가 고프다며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예약해 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준비 없이 온 자신이 민망하여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경의선 숲길 근처의 가게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마셨다. 긴장되는 순간이었기에 목이 탔다. 물을 마시려는데, 마음에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다른 파트너로 환승하는 건가요?"
대뜸 던진 그녀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당황해서 마시던 물을 뿜었다. 다행히 물이 그녀의 얼굴까지 튀지 않았지만, 식탁에 물이 뿌려졌다. 황급히 티슈로 식탁의 물을 닦아냈다. 그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작 한 번 싸운 걸로 삐져서 파트너를 갈아치우려는 그런 사람은 아닐 거라 믿어요."
당황하고 있는 내게 엘리아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저 죄송해서 그런 거죠. 다른 파트너가 있는 건 아닙니다."
"농담이에요. 정말 그랬으면 제가 밥 먹자는 이야기도 안 했죠. 그래서 결정은 내리셨어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적어도 파트너십을 하면서 도움이 되면 되었지, 짐이 되기는 싫었으니까요.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면 제가 엘리아나 님께 짐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망설여지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욕심을 내보고 싶어 졌습니다."
별거 아닌 말임에도 말을 하면서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식탁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말을 하는 동안 그녀는 턱을 오른손으로 받치며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둔 채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을 바로 쳐다볼 순 없었지만, 그녀의 팔이 정면에 있었다.
"그 말씀은?"
그녀가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파트너십을 계속 유지하고 싶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럴 거면서 왜 이렇게 뜸을 들였어요."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낯설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잘못은 제가 했는데, 사과는 엘리아나 님이 하셨죠. 게다가 연습에 보탬이 안 되는 모습에 스스로 주눅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걸요."
"그런데 이제는 하고 싶어 졌다?"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저도 제 욕망에 솔직해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제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욕심이라 생각하고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욕심 아닌 일들이 없었고, 욕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져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더군요. 그래서 스스로 물어봤습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그러고 답이 나왔습니다. 저는 탱고를 잘하고 싶습니다. 엘리아나 님과 함께 파트너십을 하며 성장해 가고 싶습니다. 엘리아나 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하는 말을 기다렸다.
"굉장히 좋은 태도네요. 솔직한 모습은 보기 좋으나, 너무 자신만을 탓하는 모습은 좋지 않아요. 혼자만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물론, 그날 굉장히 불쾌하기도 했으나, 저도 상처가 될 말을 했고, 제 스스로를 점검하지 못했으니, 할 말 없어요. 그래서 사과를 드린 거고요. 그날 다른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있는데 자꾸 말로 하지 않고 틱틱거리면서 짜증만 내니까 그게 화나 더라고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숙인 고개를 일으키며 말했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생각보다 그녀의 표정은 온화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녀는 그렇게 화가 난 상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들이 단순히 넘겨짚은 망상이란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으며, 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 하나 사람들보다 나은 게 없었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줄 알았던 자신의 모습은 사실 어린아이 같을 뿐이었다. 생각이 이어지니 한숨이 나왔다. 안심을 해서인지, 한심해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숨을 쉬고 땅을 보는데, 그녀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말 잘 부탁드려요. 제가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같이 성장해 가는 파트너십이 되면 좋겠어요."
고개를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을 거면 시작도 안 했어요."
고개를 들자 그녀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웃음은 나를 격려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 답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녀가 이어서 물었다.
"데이빗 님 혹시, '뉴스타'라고 들어보셨나요?"
"뉴스타요? 그게 뭐죠? 처음 들어봅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한국 탱고 챔피언십이 열리는데, 그중에 새롭게 탱고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종목이 있어요. 그게 뉴스타인데, 이제 막 탱고를 시작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참가해야 하는 대회인 거죠."
그녀는 이 대회를 나가지 않으면 탱고를 하는 의미가 없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대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들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은 이런 열정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가면이었던 것 같았다. 큰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녀가 신나서 이야기할수록 그녀의 제안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눈에 띄는 일을 한동안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의 제안이 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제안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탱고 계획에 이 대회는 반드시 나가야 하는 대회였고, 그 대회를 고려한 상태에서 나와의 파트너십을 시작한 듯했다. 주저하는 모습이 계속되어도 그녀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이 대회를 거절하면 과연 그녀와의 파트너십은 어떻게 될까,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이 파트너십의 미래가 보였다. 선택지는 단 두 개였다. 파트너십을 그만두거나,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대회를 나가거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답을 정해놓고 몰아가는 사람들을 싫어했지만, 왠지 지금만큼은 이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무엇이 달라졌던 걸까. 항상 자윤에게 답을 정해놓고 말한다고 화를 냈었다. 쉴 새 없이 대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뭐야, 지금 비웃는 거예요?"
그녀가 왼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요, 탱고라는 거대한 운명이 삶에 들어오는 것만 같아서요. 어쩐지 제 삶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찡그린 그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크게 웃으며 되물었다.
"이 말, 지금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이죠?"
"네, 아마도 이 대회는 제가 해야만 하는 대회인 것 같네요. 그렇게 느껴졌어요."
"좋아요, 그럼 하기로 한 거예요! 이제부터 더 열심히 연습해야 돼요. 내년 1월이나 2월쯤에 대회가 있다고 하니까, 이제 6, 7개월 밖에 남지 않았어요. 못한다는 소리 하면 혼낼 거예요."
"앓는 소리 하지 않고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라 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녹음기를 켜고는 대회에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라는 말까지 녹음했다. 어쩐지 재밌는 일 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다짐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하면서도 탱고의 이야기와 대회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됐다. 누군가와 한 가지의 주제로 이렇게 즐거운 사담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비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딘가 고삐가 풀리는 것 같았다. 여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대화가 쌓여갈수록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그때 계속해서 몸부림치던 핸드폰이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폰의 벨 소리였다. 식탁 위에 있던 엘리아나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 액정 위로 루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