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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Sep 25. 2024

메디아 루나 - 사카다 3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밀롱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지만, 어느덧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0분만 지나면 이 지루하고 낯선 공간도 끝이 날 터였다. 에밀리아와 춤을 추고 난 후로는 한 번도 론다에 나가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미 모두가 아는 사이처럼 보였고, 까베세오를 시도하려 해도 그 순간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론다로 나가버렸다. 앉아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려 애써 보았지만, 그들과의 시선이 교차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들이 내 눈을 피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에밀리아 이후로 나는 춤을 추지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면, 엘리아나는 쉴 새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루크를 시작으로, 그의 지인들이 그녀를 차례차례로 초대했고, 엘리아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들과 춤을 이어갔다. 그녀는 약 두 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춤만 추었다. 잠깐쯤은 쉴 법도 했지만, 그녀는 다시 론다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그런 와중에 에밀리아가 틈틈이 내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론다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외로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마치 혼자만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는 실력으로 말하는 곳, 그리고 나는 그 실력이 부족했다. 남자들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을, 새삼스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딴따가 끝나갈 무렵, 엘리아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파트너와 인사를 나눴고, 상대는 그녀를 친절히 자리까지 에스코트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밀롱가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11시예요. 이쯤 가셔야 한다고 하셨죠?"
숨을 고르고 있던 엘리아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확인한 후, 아쉬운 듯 론다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가야죠.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그녀는 시간을 가늠해 보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제 슬슬 나가야 하지 않나요? 막차 놓치면 집에 가기 힘드실 텐데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 지하철까지 남은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 루크가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일 쉬는 날이잖아요. 조금 더 있다가 심야 버스나 택시를 타면 되지 않나요? 아니면 첫차 타고 가셔도 되고요."
눈치 없이 루크가 둘 사이의 대화에 껴들어 엘리아나에게 말했다.


"엘리아나 님이 미리 저에게 이쯤 일어날 수 있게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내일 약속이 있으시거든요."
루크의 말을 가로막으며 엘리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고, 그 모습이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한번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쉽네요. 이제 막 재밌어지려 하는데, 여기 밀롱가는 오전 1시까지 계속되거든요."
루크는 계속해서 엘리아나를 붙잡으려 애썼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루크 님, 엘리아나 님에게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모두에게는 생활이 우선이에요."
나는 정색하며 그에게 말했다.


"아, 너무 진지하시네요. 벌써부터 파트너를 그렇게 챙기시면 나중에 더 힘드시겠어요."
루크는 웃으며 내 말의 의미를 가볍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속으로 화를 삼키며, 더 이상 말다툼을 피하고자 했다.


엘리아나는 가방을 정리하며 갈 준비를 했다. 내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던 찰나, 'Por una cabeza'의 익숙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가르델의 유명한 탱고 곡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신발을 갈아 신으려다, 그만 멈춰버렸다.


"데이빗 님도 가기 아쉽나 봐요?"
루크가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좋아하는 곡이 나와서요."
노래를 듣기 위해 잠시 동작을 멈췄다. 엘리아나도 신발을 갈아 신으려다, 다시 자리에 앉아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잘 됐네요. 두 분, 밀롱가에서 첫 곡과 마지막 곡은 파트너와 함께 추는 게 불문율이에요. 마지막 곡을 장식하고 가시죠."

루크가 론다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권했다. 나는 엘리아나를 슬쩍 바라봤고, 그녀 역시 나를 바라보았다.


"한 곡 추실래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트너라면 그래야겠죠."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론다로 향했다.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론다에 나아갔지만, 순간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론다에 진입하기 전, 뒤쪽 사람들과 눈짓으로 인사한 뒤, 비교적 사람이 적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리드를 부드럽게 따라오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가르델의 'Por una Cabeza'는 우리를 반기듯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인의 향기로 알게 된 이 곡의 의미는 의역하면 간발의 차였다. 모든 것이 그 작은 차이로 결정된다. 사랑, 기회, 운명 모두가 간발의 차에서 갈렸다. 노래 속 그가 그 차이로 사랑을 잃었듯, 나도 이 순간을 놓쳐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를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마음속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춤에 온 마음을 실었다.


그녀의 호흡과 그녀의 스텝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녀에게 집중하려 애쓰는데, 자꾸 주변에서 눈초리가 느껴졌다. 초보 '로'의 춤이 자신들을 방해했는지,  그들의 시선이 계속해서 내게로 꽂혔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와 함께, 이 밀롱가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중요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완전했지만, 함께한다는 이 순간이 모든 것을 덮었다. 마치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벽을 드디어 넘어선 것 같았다.

음악은 계속 흘렀고, 그녀와 함께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스텝을 밟았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밀롱가에서 모든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춤을 위해 앞 선 시간 모두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or una Cabeza'의 멜로디가 내 심장을 울리며 깨닫게 했다. 간발의 차로 사랑을 놓친 주인공과는 달리, 나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용기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그저 리드에만 집중하며, 발걸음 하나하나에 모든 감정을 실었다. 간발의 차로 사랑을 놓친 가르델의 노래와는 다르게, 나는 이 순간을 간발의 차로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렇게 우리의 첫 밀롱가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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