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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Nov 05. 2024

메디아 루나 - 사카다 9

sacada9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은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밀롱가에서 춤을 춘 기억에는 좋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떨리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그 열린 공간과 낯선 눈빛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엔 준비가 부족한 기분이었고, 솔직히 두려웠다. 그런데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건,  한 편으로 이 제안에 설렜기 때문이었다. 음악이 깔린 론다에 춤으로 대화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상대방과 탱고로 대화하며 느끼게 될 일체감, 그 끌림이 나를 흔들리게 했다. 단 한 번이었지만 강렬했던 경험이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하필 왜 저죠?"

잠시 고민하다가 에밀리아에게 물었다. 사실 이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왜 하필 나일까. 궁금한 건 그 이유였다. 춤을 잘 추지도 못하고, 이제 막 탱고를 배우기 시작한 내가 무슨 메리트가 있을까. 이 제안에 대답하기 꺼려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부담스러우세요? 그럼 괜찮아요. 굳이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함께 탱고를 배우는 입장에서 도와주고 싶어서 했던 제안이에요. 이게 선배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에밀리아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의 친절은 달콤했다.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나를 속여서 얻을 이익이 없었다. 이렇다 할 이유 없이 나를 돕고자 하는 그녀의 말이 거짓 같지 않았다.


"바로 답할 필요는 없어요. 매일 가자는 것도 아니고, 수업 없는 날 한 번씩 같이 도전해 봐요."

망설이는 나를 배려하듯 에밀리아가 한 발 물러섰다. 나조차도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멍하니 서 있는데, 그녀가 가볍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연락처 알려주시겠어요?"


그녀의 한 마디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연락처를 넘겨줬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번호로 전화를 했고, 핸드폰 화면에 그녀의 번호가 찍혔다. 전화가 간 걸 확인한 뒤 그녀는 연락을 기다리겠다며 말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등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엘레아나가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이렇게 놀라요?"

그녀가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 얘기 아니었어요. 선배로서 동작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고, 기회가 되면 더 알려주신다고 하셔서요."

순간 당황해서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사실을 말해도 될 일이었지만, 어쩐지 있는 그대로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래요? 뭔가 더 있는 것 같던데?"

엘레아나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빤히 바라봤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웃어넘겼다.


"흠, 알겠어요. 선배들의 피드백을 듣는 건 좋은 일이죠. 저도 아까 루크 님이 몇 가지 조언을 해주셨거든요. 서로 들었던 걸 확인하면서 맞춰볼까요?"


그녀는 몇 번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생각보다 그녀가 탱고를 대하는 태도는 더 진지했고, 열정적이었다. 아까도 루크와 탱고에 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녀를 백 프로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녀가 루크와 이야기할 때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녀가 나를 두고 루크와 파트너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어쩌면 순진하게 내가 그녀의 말을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의문이 들었다. 나처럼 다른 제안들을 들었지만, 숨기는 걸지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고민은 더 깊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일단은 축을 세우는 게 먼저 일 거 같아요. 서로가 함께 춤을 만들어 가려면 먼저 자신이 바로 서야 한다고 했어요. 기둥처럼 단단한 축을 세워야 춤이 흔들리지 않고 아름답게 나올 수 있데요. 그러니 우리 이거부터 먼저..., 데이빗 님? 듣고 있죠?"


그녀가 들은 피드백들을 정리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잘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이 많아져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파트너십을 하기로 했으나, 과연 정말 이 파트너십이 유지가 될 것인지, 연습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하듯 집어삼켰다. 자연스레 표정은 멍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아, 네,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에요. 맞는 말씀이세요. 축이 중요하죠. 그렇게 연습하면 될 거 같아요."


"집중하셔야 돼요. 우리는 갈 길이 멀다고요. 벌써부터 멍해지고 포기하고 싶어지면 안 됩니다! 힘내요."

그녀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아진 탓에 내가 탱고를 포기하려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걱정하며 내게 말했다. 포기하지 말자고 힘을 북돋아 주려는 듯 나를 격려했다. 그녀의 격려를 들으며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전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작게 파이팅 외치며 이어서 들었던 피드백을 공유해 주었다. 그녀의 피드백을 듣고, 나 또한 들었던 피드백을 공유했다.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자 그녀가 말했다.


"결국, 탱고도 사람 관계랑 크게 다르지 않네요. 원리는 똑같은 거 같아요."


"똑같다뇨? 어떤 부분이요?"


"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잖아요. 자신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모든 관계가 제대로 이뤄지기가 어렵잖아요. 탱고도 자신이 축이 서지 않으면 춤이 되지 않으니까. 그 부분이 비슷한 거 같다고 느껴졌어요. 자, 봐요, 제가 춤출 때 상대방한테 마냥 기대기만 하면 상대방이 힘들겠죠. 마찬가지로 데이빗 님이 춤 출 때 쓰러지기만 하면 춤이 안 되겠죠. 둘 다 서로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이 바로 서야 그때부터 제대로 춤이 시작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참 닮았다고 느꼈어요."


그녀는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것인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선은 나를 향하는 듯했으나,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런 그녀를 기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렇게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데 그녀가 말했다.


"마치 연인 사이 같아요."


그녀의 말에 당황해서 되물었다.

"네? 뭐가요? 파트너십이요?"


"아니요, 탱고란 춤이요, 춤에서 필요한 조건들이 마치 연인 사이에서 필요한 것과 비슷한 거 같아서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이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둘이 하나 되는 춤이잖아요. 서로의 심장을 느끼는 춤이니까, 비슷한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비단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그렇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건 그런 거니까. 중요한 건 결론적으로 저보고 축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잖아요?"


"네, 맞아요. 데이빗 님 상체가 너무 숙여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부터 같이 고쳐나가요."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엘레아나 님도 해당되는 거 아시죠?"


"저도 마찬가지죠. 저도 잘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함께 신경 써봐요."


우리는 각자 당장 고칠 부분과 더 연습해야 할 부분을 정리한 뒤 동작에 집중했다. 저 멀리서 어떤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녀와 연습에 몰두하느라 주위의 시선은 자연스레 잊혔다. 연습을 하며 그녀가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동작에 집중했다. 연습이 끝난 후, 엘리아나는 일이 있다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자 눌러두었던 생각들과 질문들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짐을 정리하며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나,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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