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의 비밀

by 시연

나는 엄마 아빠의 첫 아이로 1970년 겨울에 태어났다. 분명히 태몽을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거창하지 않아도 기억하고 있어야 마땅한 것 같아 곰곰이 떠올려 보았지만, 기억 어느 자리에도 없다. 결국 동생에게 물었다. 너는 기억하느냐고. 하지만 동생 또한 선명하지 않은지 고개까지 갸우뚱하며 과일이었던 것 같다고, 우리 둘 다 과일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좀 더 귀담아들을 것을. 엄마 아빠가 모두 안 계신 고아가 된 까닭에 이젠 확인할 수 없으니, 출생의 비밀이 되었다.


엄마의 뱃속에 아직 내가 있을 때, 엄마는 충청도 어디쯤에 거주하고 있었다. 친정이 있는 서울도 아니고 시댁이 있는 인천도 아닌 충청도 ─나중에 꼭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해 놓고 아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에서 광산을 운영하시는 아빠 곁에 머물렀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시골 살림은 도시보다 열악하여 서울 여자의 시골 생활은 그 힘듦이 더 컸을 텐데, 남편 옆이면 상관없었던 걸까. 다니러 오신 친할머니가 ‘집으로 가자’고 부추겼음에도 엄마는 굳이 거기에 머무는 쪽을 택했다.


달랑 한 칸짜리 방이 전부였던 집에서 엄마와 아빠는 나를 만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 중이라 괄약근 조절이 어려웠던 엄마는 그만 ‘뽀옹’ 방귀를 뀌고 말았다. 부끄러움에 부른 배를 감싸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말했다고 했다.

“처음이죠?”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아빠는 방귀 소리가 아닌 ‘처음’이라는 말에 의자 너머의 엄마를 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었다고 했다. 어쩌면 일부러 못 들은 척했던 건 아닐까. 뱃속의 내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니 이후로는 두 분 서로가 방귀를 텄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 아빠 눈에는, 방귀를 뀌고 수줍게 고개 숙인 엄마가 얼마나 예뻐 보였을까. 30대의 아빠와 20대의 엄마가 나를 기다리며 행복했을, 그 시간이 보이는 듯하다.

너무 기다린 탓일까. 산달이 되기 전 산통이 시작된 엄마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했다. ‘우리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도와주세요.’ 천주교 여고를 다녀 주기도문을 줄줄 외웠던 엄마가 어찌하여 갑자기 부처님을 찾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엄마의 기도 덕분인지 나는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했음에도 건강하게 태어났다. 2.4kg 미만이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는데, 2.4kg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고, 체구는 작았어도 모든 것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일평생 자상하고 소녀 같던 엄마와 선한 아빠의 첫 아이인 나는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다. 특히 엄마의 사랑은 한없이 컸다. 친척 어른들의 말씀을 빌리자면, 다 키우는 아이를 혼자만 특별한 듯 ‘너무’할 정도였다고 말씀하셨고, 조금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자라는 줄 알았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다.


엄마를 닮은 두 살 터울의 동생에 대한 질투였을까. 차별 대우를 받는 것 같다며 엄마를 더러 힘들게 했는데, 생각해 보면 겨울에 태어난 아이를 키우기 위해 1970년 충청도 어디쯤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세탁기도 없었을, 고무장갑이라고 넉넉했을까.


두 살 아래 동생이 태어날 무렵, 엄마는 충청도가 아닌 인천에 거주하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괜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첫 아이인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둘째 아이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더군다나 여동생은 엄마의 외모를 쏙 빼닮았으니 어쩌면 내가 느꼈던 ‘차별 대우’가 진실일 수도 있겠다. 실은 아빠의 외모를 빼닮은 나는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출생의 비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