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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반짝임, 몰입.

인간은 반짝거릴 수 있다. 그 순간을 기다린다.

by 김유연

아주 오랜만에 챗GPT의 초안이 아닌 글을 쓴다. AI의 수정을 거치지 않는 글쓰기가 어색하다. 그래도 옮기고 싶은 내용이 생겼다. 노트북 키보드가 아닌 종이에 펜으로 꾹꾹 눌러쓰던 모닝 페이지에서 간만에 찾아낸 어떤 아이디어를 여기에 적어본다.


혹시 알고 있는가? 인간은 반짝거릴 수 있다. 그 반짝거림은 그 사람만의 당당함, 여유로움, 분위기나 섹시함 따위로 타인에게 전달된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 깊이 몰입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는 그 몰입 바깥의 것을 발견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언제나 갖고자 했던 나의 결핍, 그 당당함과 자유로움의 정체를 실은 알고 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제야 언어의 그물을 쳐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구체화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 몰입-반짝임-당당함이란 이 삶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고 있는 상태다. 그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흘러나온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넘어 이 세상 무언가에 대한 깊고 통렬한 호기심이고 일종의 계시이다. 그것을 찾은 자는 자신의 몰입 대상을 '업'이라 칭할 테다.


나도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놀라운 일들을 이뤄냈다. 성과를 냈고 좋은 사람들과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 왕성한 호기심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면 나타나는 눈빛이 있었다. 참으로 빛나던 때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느냐? 하면, 그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이것은 이 반짝임을, 다른 어떤 형태로 든 간에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진대- 몰입은 결심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이 인정하는 대상에만 진정 진심으로 푹 빠질 수 있다. 그것은 차라리 사고에 가깝다. 결심이나 목표 설정 같은 의식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물론 의식적인 수준의 결심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반짝임이라 부르는 몰입의 수준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과의 공명(다른 말로 하자면 '진짜 호기심')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내가 또한 아는 것은 그 배우고자 하는 의식 수준의 결심(억지 호기심)을 가능한 한 많이 발동하는 것이 진짜를 찾는 데에 유리하다는 사실이다. 많이 노출되어야 진짜에 접할 확률이 늘어난다. 당연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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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뜨거운 열정에 온몸과 정신이 한 방향을 향하고 다른 곳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움직이고 탐하고 갈망하는 그 느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호기심의 방향이 이 세상의 요구와 겹쳐진다면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낼 테다. 그것은 내 몫을 넉넉히 늘리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싶다는 탐욕스러운 욕구마저 충족시킨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가슴 한구석을 지배하는 초조함을 진정시키고 행동하는 것이다. 자꾸자꾸 새로운 것을 접하고 나를 개방하고 세상을 탐색해야 한다. 아니, '해야 한다'는 말에서 벗어나 그렇게 그냥 하는 것이 좋다. 행동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행동만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처음에는 형편없어도 좋다. 그 초라함에 도망치고 싶어도 좋다. 행했다는 사실에 가슴 뻐근한 뿌듯함을 느끼면 그만이다. 하고 싶으면 해라. 그것이 눈치 보지 않는 나의 긍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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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을 막는 것은 완벽주의와 게으름이다. 둘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조금이라도 버겁게 느껴지면 바로 회피 모드가 발동한다. 뇌를 두려움으로부터 도피시키고자 릴스나 쇼츠 따위를 찾게끔 만들고 도파민에 푹 절여지게 만든다. 그것은 내 무의식이 '이 일을 버겁게 느끼고 있다'는 신호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들어가 보면, '잘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완벽주의가 게으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순간 게을러졌다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비생산적인 일들을 자꾸만 찾게 된다면 그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내 경우에는 완벽하지 못한 결과(=실패)가 그 대상이다. 그걸 인식할 수 있다면 차라리 '형편없어도 좋다'라는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주절거림은 반짝임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이다. 형편없어도 좋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믿고 스스로를 설득해 납득시키려는 과정이다. 실행의 N수를 늘리고 늘려 진짜 호기심을 탄생시킬 그것에 닿기 위한 과정이다.


억지로 하지 말라. 진심으로 내켜서 하라. 그것이 반짝임의 비밀이다. 그것을 알라. 머리로만 알지 말고 몸으로 깊이 느끼고 인식하여 행동에 반영하라.


내가 반짝임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의미를 부여해 좇는 것도 진심으로 그 일이 내켰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이 글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KakaoTalk_20250505_162913384.jpg 딱히 내용과는 관련 없는 미감 충족을 위한 사진. 직접 찍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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