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에 대하여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건 여름쯤이었다.
이상하게 보일러가 온수가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다. 샤워를 하다 보면 갑자기 온수가 안 나와서 차가운 물이 나오다가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오다가, 온도가 오락가락했다. 아예 안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바로 직전 겨울에 보일러를 바꿨기 때문에 설마 일 년도 안 돼서 고장이 난 걸까 싶기도 했다. 왠지 파보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들고. 불편하긴 했지만 여름이었기 때문에 그냥 좀 시원한 물로 씻어도 괜찮았다. 여름엔 차가워 봤자 차가운 물이 아니라 그냥 시원한 물이었다. 그냥 두면 약간 불편하지만 힘든 건 아니었다.
겨울이 왔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나오고 온수가 너무 느리게 나오고 너무나 춥다. 그리고 11월이 되자마자 완전 한겨울 느낌이다. 바깥 온도는 영하다. 그냥 참고 넘기기엔 너무 차가웠다. 보일러 온수로 검색해 보니 수압이 낮으면 그럴 수 있다는 글을 봤다.
아니 그러고 보니 수압도 낮았다.
원래 수압이 쎈 집은 아니었지만 물을 두세 개 같이 틀면 약해지는 게 느껴졌고 샤워하는 동안 다른 화장실에서 물을 내려도 씻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 물을 두 개 쓰면 너무 쫄쫄쫄 나오기 시작했다. 직수 정수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설거지나 다른 물을 쓸 때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다른 집에서 물을 많이 쓸 거 같은 저녁 7~9시 사이에 특히 수압이 더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올해부터 수압이 낮아진 거 같았다.
사실 수압은 처음 이사 온 몇 년 전에도 쎄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사 오자마자 수압이 낮은 것 같은데 조절이 가능하냐고 관리사무소에 문의했고 양수기 밸브를 양껏 열어주고 가셨다. 원래 이 정도 씩 나온다는 말과 함께. 아파트에 처음 입주해서 그런지 원래 아파트는 그런 건가 싶었다. 여러 세대가 있으니 수압이 낮아질 수 있겠지.
그 수압이 그마저도 더 낮아져서 보일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건가.
식구들 모두 수압이 낮아진 불편함을 느끼던 중 주말 저녁 손님들이 왔다. 그 수압이라는 건 천천히 끓는 물에 개구리 익듯이 천천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지인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아니 이 상태로 안 답답해? 씻을 수는 있어?
이게 심각한 수준이었구나.
불편하다 번거롭다 느꼈으나 나만 참으면 된다 생각했다. 참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수압을 높이더라도 다른 집에서 물을 많이 쓰는 시간대에는 동일한 물을 가져다 쓰는데 많이 쓰는 시간 대면 당연한 거 아닐까? 그럼 내가 물 쓰는 시간이 다른 사람들도 밥 지어먹고 씻는 시간이니까 수압이 낮아지겠지. 그리고 한편으로 이미 수압으로 몇 년이 지나긴 했지만 클레임을 제기했고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더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들어서 그러려니 하고 체념하기도 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편함의 총량에 대해 생각해 보곤 했다. 우스갯소리로 지랄 총량의 법칙처럼 불편함에도 총량이 존재하여 한 편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면 그만큼 편해지는 다른 한 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마무리를 하나 더하고 오지랖을 한 번 더 부려보고 번거롭지만 하나 더 일을 처리했던 것도 내가 그렇게 조금 더 일하면 다른 사람이 편해지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꼭 일적인 게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의 사소한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내가 조금 더 감수한다면 다음 사람이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겠지. 그래서 나는 불편함이 느껴졌을 때 우선 참고 기다리는데 익숙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만 차갑고 추운 게 아니었다. 마냥 참을 수 없지. 물론 다시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진 않았다. 어차피 더 할 수 없는 거라고 할 텐데 관리사무소에서 방법이 없다고 하면 어디 누수 업체를 불러봐야 하나, 돈은 얼마나 들까, 산 지 얼마 안 된 보일러는 역시 이름 있는 유명한 회사의 보일러가 아니어서 1년 만에 고장이 나고야 만 것인가. 다음에 보일러 살 때는 메이저 회사에서 사야지... 온갖 고민이 미리 머릿속에 가득 차버렸다.
기사님이 오셔서 물이 나오는 모양을 한 번 보더니 양수기함을 열어보신다. 파란색 천으로 꽁꽁 싸매여있는 것을 뜯어내니 빨간 밸브 왼쪽 옆에 단단히 잠긴 무언가가 보인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기사님이 열심히 돌려서 열어보니 안에는 삭아버린 스프링과 엄청난 녹... 15년 정도 되면 이 스프링이 삭고 심한 세대는 고무 파킹 2개가 더 삭아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신다. 본인이 오시고 100세대 정도는 스프링 교체해 준 것 같다며 이렇게 수압이 낮은데 참고 살았냐고. 우리 집은 스프링만 교체하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파란색 천을 한 번도 안 뜯은 걸 보니 집 짓고 나서 이전 주인들도 아무도 교체하지 않은 상태로 온 것 같다고.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스프링 교체하고 나니 이럴 수가. 내가 여기 살면서 보지 못한 수압의 물이 콸콸 쏟아진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는 수도가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양수기함만 조절하면 세대에서 바로 수압조절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이렇게 원인이 분명한 불편함이었다고?
나는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 이 불편함을 참았을까. 막연히 한 번 개선에 실패했기 때문에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몇 년을 살았던 것 같다. 다른 곳으로 얼른 이사를 가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고. 이렇게 쉽게 고칠 수 있을지 몰랐다. 처음 관리사무소에서 왔을 때도 그렇다면 스프링을 교체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분은 아예 모르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더 알아볼 생각 없이 안 되는 거구나 하고 포기하고 살았다. 어쩔 수 없지. 안 되는 일에 스트레스받지 말아야지 하며. 그래서 클레임을 걸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한번 안된다고 거절받으면 바로 수긍하는 편이다. 악착같이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되는 게 거의 없는 우리나라지만 나는 잘 못하겠다. 어려워.
수압 조절은 빨간 밸브로 하는데 너무 세서 살짝 잠가 보았는데 수압이 줄어드는 느낌이 안 든다. 정말 다 잠기는데 7~8바퀴가 도는데 거기서 1/4바퀴만 살짝 열어도 원하는 만큼의 수압이 시원하게 나온다. 아마 스프링이 삭으면서 점점 더 돌려서 8바퀴 모두 여는 그날이 또 오겠지. 그전에 이사 가자.
수압이 좋아지니 온수는 아주 따뜻하고 끊김 없이 너무 잘 나온다. 설거지를 하는데 그릇에 묻은 양념이 수압에 시원하게 씻겨 나간다. 샤워를 하는데도 더운물이 끊기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물 쓰는 중에도 화장실을 얼마든지 갈 수가 있다. 세탁기 돌아가는 시간과 샤워시간도 짧아진 것 같다. 이게 이렇게 행복할 일인가. 수압만 쎄졌는데 하루 종일 삶의 만족도가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보는 사람들마다 수압이 쎄진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너무 좋아.
다른 불편함이 생기게 되면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급 수도 요금과 가스 요금 걱정이...
20231116
추가) 20240912
여전히 이사는 가지 못했다.
가스요금은 생각보다 많이 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