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기계
요즘 피아노 연습을 시작했다.
피아노를 배운 건 국민학교 1학년~6학년 초 정도 다녔다. 배운 건 체르니 40인가 50까지 배우고 작품집도 초반에 조금 들어갔는데 원비가 오르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엄마는 피아노 학원비 낼 돈으로 피아노를 사주겠으니 집에서 연습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아직도 피아노를 사주시진 않았다. 따로 반주법 같은 걸 가르쳐 주지 않는 학원이었고 나는 창의성이나 응용력이 현저히 낮아서 악보만 보고 치는 정도였던 것 같다. 나름 피아노를 잘 친다고 생각하고 중2 때 선생님 축가 반주를 치겠다고 나섰다가 폭망 한 뒤로 나는 피아노를 배운 적은 있으나 홀랑 까먹은, 반주법은 모른다로 나의 수준을 정의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고 나서 가끔 악보를 보고 쳐보려고 했으나 어쩌다 한번 본 악보는 이제 어디 어느 계이름인지 전혀 가늠도 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어릴 때 배운 피아노를 홀랑 잊어버렸으나 언젠가는 치고 싶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원래 큰아이가 1학년일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막연히 악기 하나 다룰 줄 알면 멋지겠다 생각했다. 수학 교수님이 피아노의 조화에 대해 설파하며 취미가 피아노라고 할 때 상당히 멋져 보였다. 가끔 스트레스를 풀 때 꼭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음악으로 풀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건 나의 바람이니까 아이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는 것도 안다. 다만 시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맞벌이고 원하는 곳까지 차량이 되어야 학원을 다닐 수 있었는데 생각 보다 그런 학원을 찾는 게 여의치 않았다. 이래서 다들 학군지 가는 건가 싶기도 하다. 선택의 폭이 너무 적다. 여튼 3학년이 되어 아이가 직접 도보로 다니는 게 가능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하던 아이가 3학년이 되니 시큰둥 해졌다. 뭐든 시큰둥 해지는 나이가 시작된 건지. 그래도 잘 달래서 한 번 다녀보자 꼬셨다.
생각보다 아이는 피아노를 너무 재미있어했다. 보통 유치원생부터 시작하는 피아노 학원이어서 그런지 3학년인데 떠듬떠듬 바이엘부터 치는 게 굉장히 속상해했다. 다른 또래 친구들처럼 음악 같은 걸 연주하고 싶은데 그게 되지 않으니 빨리빨리 진도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진도가 빠른 게 무슨 소용인가. 어릴 때는 기본이 착실해야지. 그렇게 치고 싶은 음악과 배우는 연주와의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 있는 손바닥만 한 피아노 장난감으로 양손을 올려놓고 학원에서 배웠던 걸 집에서 치기 시작한다. 두 개 건반이 같이 소리도 안 나고 크기도 너무 작아서 엉성하기 그지없는. 근데 그렇다. 아이가 그러고 있으니 평생을 못 샀던(?) 아니 안 샀던(!) 피아노를 지르게 되었다. 체르니는 들어가고 나면 피아노를 사줘야 할까 생각했는데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바이엘을 한창 배우던 때에 전자피아노를 질렀다. 아마 이건 사실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나의 못다 한 숙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피아노가 있다! 나도 피아노 연습을 해봐야지. 너무 좋아.
처음 피아노 칠 때는 뜨문뜨문 계이름을 세어가며 치기 시작했다. 악보에 계이름을 적어놓고 싶은 충동이 강했으나 꾹 참았다. 오선지를 벗어나면 계이름을 세어 내려가는 게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이랬었나. 그땐 악보 보면서 바로바로 쳤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악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마도 이것도 친해져야 하는 일인 것 같다. 눈으로 악보를 보고 해당 음이 피아노의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아는 건.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얼추 보고 치기 시작한다. 다만 계이름이 먼지는 바로 생각은 안 나지만 손이 움직인다. 어릴 때처럼 하농이나 체르니 같은 걸로 기본기를 연습하면 좋겠지만 우선은 치고 싶은 곡 먼저 연습해 본다. 아주 매끄럽게 넘어가질 못한다. 하나하나 틀리고 박자가 어색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많이 쓰는지. 연습을 하고 나니 새끼손가락이 너무 쑤신다. 며칠 연습하고 나면 덜 아픈 것 같다. 역시 연습만이 살길인가. 필라테스처럼 피아노 근육도 쓸수록 튼튼해지는 건가. 매일매일 꾸준히 연습을 못하니 며칠 쉬다가 연습하면 역시나 새끼손가락이 아프다. 손가락이 이렇게 아프지 않으려면 하농을 연습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책을 하나 더 사야 하나. 우선은 소곡집으로 간단한 거 먼저 쳐보고 있는데. 새끼손가락이 아프거나 원하는 음이 정확하게 안 눌려질 때, 두 건반이 뭉개져서 눌릴 때는 기본 연습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아들이 몇 가지 노래를 집에서만 연습하고 안 보고 연주하기 시작한다. 역시 어디든 피아노 있는데서 연주하려면 악보 없이 치는 연습도 해봐야지. 나도 악보를 덮고 피아노를 쳐본다. 아니. 첫 음부터 어딜 눌러야 할지 모르겠다. 왜? 왜지 이상하다. 악보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면 그래도 틀리더라도 계속 막힘이 없는데. 뭐가 문제일까. 아들은 왜 완주를 하고 나서 혼자 뚱땅거리면서 암보를 완성하는 데나는 왜 안되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타자를 칠 때 자판을 보고 치지 않는다. 그냥 손가락이 이제 위치를 익혔는지 생각을 하고 자판을 보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화면을 보면서 생각을 그냥 친다. 정해진 위치에 손가락을 누르고 생각을 시작하면 손가락은 알아서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가끔 글자가 틀리긴 해도 자판을 보면서 수정하진 않는다. 글 쓸 내용이 있으면 그저 타자기가 된 느낌이다. 입력과 출력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떻게 처야 하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맨 처음 양손 검지를 'ㄹ'과 'ㅓ'에 올려놓고 시작한다. 해당 자판에는 볼록하게 표시가 되어 있어서 사실 보지 않고 손가락을 올려도 검지가 해당 위치를 찾아낸다. 자판을 볼 일이 거의 없다. 뭘 보고 치는 게 아닌 블로그 포스팅을 할 때는 가끔 화면을 보지 않고 멍 때리면서 치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피아노 칠 때도 그렇다. 악보를 보면서 건반을 동시에 확인하면서 치지 않는다. 처음 시작 자리를 악보를 보고 잡은 다음 오선지에서 위아래가 움직이는 거에 맞춰 손가락도 움직여 주는 것 같다. 일일이 건반을 확인하며 손가락을 이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악보를 덮고 그저 건반을 쳐다보면 아주 낯선 기분이다. 내가 이걸 쳤었다고? 요즘 아주 쉬운 버전의 캐논을 연습하는데 선율이 변하는데 생각해 보니 연주가 어떻게 진행될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악보를 입력해서 그냥 손으로 출력하고 있었다. 그냥 뭐랄까 자동화된 느낌. 안 되겠다. 이렇게 피아노 치는 게 맞는 걸까? 그건 그냥 기계가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쳐야 나중에 변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는 곡하나를 치고 나면 위아래로 음계를 바꿔가면서 다양한 음으로 같은 곡을 쳐보는데 나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안 되겠다. 연습하는 방법을 좀 바꿔야겠다.
우선 악보를 보면서 건반을 보고 계이름을 떠올린다. 계이름이 어떤 순서로 이동하는지도 머릿속에 넣는다. 중간중간 악보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고 건반만 보면서 친다. 다음에 나올 음을 생각해 본다. 4장짜리 악보를 연습할 때 앞에는 안 보고 뒷부분을 펴놓고 연습한다. 넘기는 부분은 미리 넘기거나 나중에 넘겨본다. 확실히 악보를 안 보고 치기 시작하니 음이 어떤 순서로 쳐야 하는지가 더 머릿속에 기억되고 오래 남는 것 같다. 3장 정도 암기가 된 것 같다. 건반만을 보면서 연주하니 더 내 거 같은 느낌이다. 악보도 더 잘 기억이 나는 것 같다. 머리로 생각하고 건반으로 보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니 아주 혼란하다 혼란해. 그치만 연습할수록 편해진다.
어떤 일을 할 때 생각이 개입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것 같다. 생각이 개입하지 않고 자동화되어 처리되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기계가 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빨리 처리할 수 있다. 단순 반복하는 집안일이 그렇고 타자가 그렇고 하마터면 피아노 치는 일도 그렇게 될 뻔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번거롭고 조금 느리더라도 생각을 넣어서 진행하면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조금 느리더라도 기본기를 넣어 놓고 시작하면 점점 속도가 붙고 정확하게 빨라진다. 알바생이 처음 들어오면 항상 이야기했다. 빠르지만 덤벙거리는 것보다 느리지만 꼼꼼한 게 좋아. 느리지만 꼼꼼한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붙지만 빠르지만 덤벙거리는 건 고치기가 힘들다고. 물론 느리면서 덤벙거리면 더 답이 없지만. 그리고 그러려면 일 시작 전에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할지 생각하고 어떻게 일할지 생각하고 틀린 걸 찾았을 때 생각해서 고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기계가 되지 않으려면 생각이 필요한가. 그치만 요즘 기계는 스스로 틀린 것도 학습해서 개선한다고 하는데. 그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많은 레퍼런스를 참조해서 최적의 레퍼런스를 찾는 게 아닐까. 최적이라는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 걸까. AI가 글을 써준다고 하는데. 결국 온갖 정보를 찾아 그럴듯하게 짜깁기하는 게 아닌가. 그건 창의적인 걸까. 생각도 AI처럼 내가 받아들이 수많은 정보들을 짜깁기한 결과가 아닐까. 거기서도 뭔가 내 머릿속에서만 발화되는 무언가가 있을까. AI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 짜깁기가 옳은지 아닌지는 사람이 생각해서 판단해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갈 건가. 이렇게 포스팅을 하는 것도 어쩌면 AI에게 리소스를 제공하는 게 아닌가.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과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