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나는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가. 종종 생각해 본다.
나이 마흔 정도가 되면 다들 본인만의 확고한 취향이 생긴다고 생각했고 나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그런 취향이 생길 줄 알았다. 20대 시절 자기만의 확고한 패션스타일이 있는 친구를 보며, 특정 장르의 음악을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친구를 보며, 축구에 빠져있는 친구를 보며, 다들 저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취향이 뚜렷하구나. 나도 나이가 들면 점점 쌓여서 무언가 취향을 갖게 될까. 사실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한 편인데. 이렇게 취향이 없는 건 자기 주관이 없는 게 아닐까. 아직 스무 살이니까 괜찮아. 했지만 어영부영 40대가 되니 취향이 없는 게 문제는 아닐까 고민된다.
취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전 나는 취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타인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일 수록, 그게 어려운 사람일수록 최대한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내가 취향이 없는 사람인가. 무색 무취한 사람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좋거나 싫어하는 게 전혀 없진 않다.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싫어하는 소리가 있다. 그런 걸 취향이라고 한다면 없진 않다. 그러면 왜 드러내질 않는 걸까. 요즘 쇼츠를 보면 취향이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다고 하는데 정말 좋을까.
사실 나는 취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40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생길 거라 믿었던 취향은 '무던함'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점심메뉴가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먹고 싶었던 거라도 상관없어. 이 장소가 소란스럽지만 너랑 함께여서 괜찮아. 못 견딜 만큼 불편하지도 않아. 그럴 수도 있지. 나만 가만히 있으면 다 좋은 거 아니야?
그러다 문득 이게 좋은 건가 싶다. 내가 좋고 싫은 걸 가까운 사람조차 모르게 숨기는 게 맞는 건가.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게 과연 좋은 관계 맺기 일까. 생각해 보면 가까운 사이수록 나의 호불호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게 싫고 저게 좋아. 하지만 강요하진 않아. 그건 내 취향이거든.
어떤 단어를 보면 무슨 한자로 쓰였는지 내 맘대로 추측하곤 한다. 취향. 정말이지 나는 취할 취, 향기 향으로 쓰는 줄 알았어. 왠지 취향이라는 단어는 향으로 끝나니까 향기 같았지. 내가 나이 들면서 즐겨 쓰게 되는 향수처럼 내가 취하는 향이, 그래서 나를 드러내는 향기가 나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호불호가, 내가 선택한 결과들이 모여서 나의 취향이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정확한 게 좋다며 검색을 했는데 방향이라니. 내가 취하는 방향이 나의 취향이라니. 단순한 호불호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인생의 방향이 나의 취향이었어
국어사전 검색 결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다. 내 마음의 방향. 내 마음을 솔직하게 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주변에 흩어진 취향의 흔적들로 마음이 가고 싶은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새 어느 길로 가고 있는 걸까. 살면서 주어지는 온갖 자잘한 선택들이, 내 마음이 가고 싶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을까.
단순히 호불호를 취향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는 오이를 싫어하지만 쌀국수를 좋아해. 이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오이와 당근을 선택할 일이 있을 때 당근을 선택하게 되는 게 취향이 되는 건가. 왜 당근을 선택했지. 당근이 먹고 싶었나? 당근을 좋아하긴 하지만 막 먹고 싶던건 아닌데, 싫어하는 오이를 피하기 위해 당근을 고르게 아닐까. 그렇다면 취향은 그저 하고 싶은 마음 아닌가. 다들 싫은 걸 피하고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 하지 않나. 그럼 사람들의 취향이란 각자의 호불호에 맞춰서 그냥 좋아하는 걸 하는 거잖아.
아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누구나 있겠지. 물론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만 선택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취향을 만드는 게 아닐까. 제일 좋은 게 아니면 안 해. 제일 좋아하는 건 없지만 이것도 괜찮네. 아냐 제일 좋은 게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싫은 건 절대 싫어.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참아 볼까. 결국 차선을 선택하는지, 차악을 선택하는지, 최선이 아니면 하지 않는 건지. 이런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이 취향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에게 맞춰주고 싶었던 내 취향. 특히나 학교를 다니고 화사를 다니던 그 시간 동안엔 더 숨기고 있었던 취향. 만약 온전히 나 혼자만 있다면. 그때 무엇을 향해 마음이 생길까.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요즘. 내 취향은 도파민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루 종일 쇼츠만 쳐다보고 있는다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게 맞다는 걸 알지만 자꾸 손이 간다. 아이들에게 적당히 하라고 통제하면서 막상 스스로는 통제를 하지 못한다.
갑자기 탄수화물을 마구 먹는 것도 도파민에 중독된 건가 싶다. 당중독인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장의 즐거운에 눈과 혀를 내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이래가지곤 취향이 없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겠다. 마음의 의지 없이 습관적으로 켜는 쇼츠와 정제탄수화물에 매번 지고, 매번 후회하고, 다짐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게 없어 속상하다. 요즘 나의 취향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편하지는 그런 방향인 것 같다. 이걸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대로 놔둬도 될까. 조금 위험한 거 아닌가. 취향이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한 결과물인가. 마음이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도록 두면 안 되겠다. 아니 차라리 마음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다행이다.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하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지 않게 하여 마지막엔 결국 취향마저 사라지게 되는게 아닐까. 사라지기 전에 취향을 붙잡아야겠다. 좀 더 확실히 해야겠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202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