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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lk slow Oct 29. 2024

질투의 추억

임테기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던 그 때 말이야

 드라마에서 보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들고 있던 물건을 놓아버리곤 한다. 실제로 저러는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임신 준비를 할 시기 추석 즈음에 어이없게도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과수원을 하시는 나의 시부모님께 추석은 명절보다는 대목이다. 추석을 앞두고 과수원 일이 너무 바빠 음식 할 시간이 없으시다고 내게 명절 음식 몇 가지를 부탁하셨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막상 추석이 다가오니 걱정과 귀찮음이 앞섰고 일단 장을 봐야 했기에 집을 나섰다. 혼자 가기 심심할 것 같아 강아지를 포대기 같은 가방에 넣어 들쳐 매고 나섰는데 그때 엄마가 봤더라면 나는 등짝 한 대 얻어맞고 혼자 나섰겠지만 안타깝게도 엄마는 잠시 부재중이었다.

 땀을 흘리며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휴대폰이 짧게 반복적으로 울려댔다. 단톡방에서 무언가 화젯거리가 생긴 듯 하였으나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무슨 주제인지만 확인하려고 슬쩍 폰을 켰다. 친구들 단톡방에서 화면에는 축하한다는 말들이 번뜩거렸다. 생일도 아니고 취업이나 시험 같은 걸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느낌이 쎄하다.

 당장 확인해야겠다. 강아지를 가방에서 내려놓고 단톡방으로 들어갔다.



지은 : 응 산부인과 가서 심장 소리 확인했어. 기분 이상하더라.

친구 1 : 어머 웬일이야 축하해!!!! 너희 아기 엄청 예쁠 것 같아!!

친구 2 : 우와~~ 축하해!!! 언제부터 준비 한 거야? 이제부터 몸조리 잘 해야 잘 해야겠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지만, 출산이 너무 두렵다며 임신을 몇년째 미루고 있는 친구 지은이의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이었다. 정말 드라마처럼 장바구니를 손에서 놓치고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단톡방 메시지를 모두 읽어 마지막 1이 없어져 버렸으니 어서 빨리 나도 메시지를 써야 했다. 차가운 얼굴로 글자를 써 나갔다.



나 : 우와!! 정말 축하해!!^^ 남편도 엄청 좋아하겠다~~~ㅋㅋㅋ



 임신 준비는 특별히 하지는 않았지만 몇 달 전부터 생각은 했다는 애매한 말과, 임신 소식에 기쁘기보다는 아기 낳을 생각에 무섭기만 하다는 지은이의 답이 왔다. 기쁘진 않고 무섭다라… 임신 준비는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마음이 베베 꼬이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리드줄에 매어 내려놓고 장바구니만 들고 집으로 향했는데 어쩐지 장바구니가 더욱 무거워졌다. 단톡방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뜨거웠고 나의 질투심을 누군가 눈치챌까 마음에도 없는 축하와 덕담을 중간중간 몇 번 끼워 넣었다.

 

  장 본 재료들을 대충 냉장고에 던져 넣고 소파에 드러누워 ‘LA 갈비, 명절 음식..’ 등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엄마~ 갈비 주문하면 내일 안 오겠지?”

 “왜? 시키게? 안 만들어?”

 “만들기 싫어”

 “에~?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러는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생각하다 울음이 터져버렸다. 엄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은데 꼭꼭 잠가도 스물스물 삐져나오길래 확 틀어 버렸다. 잠시동안 시원스레 울다가 주섬주섬 감정을 챙기곤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우리 딸 고생하는 거 보기 싫어서 사실 아이없이 너희 부부끼리 재미나게 살았으면 좋겠다며 엄마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로 날 토닥였다.

 “네가 생리할 때 되어서 감정이 더 그런가 보다”

그렇다. 말은 안해도 우리 엄마는 내 생리주기까지 줄줄 꿰고 있다. 사실 생리할 때가 며칠 지나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추석날 시부모님들께 임신 소식을 알리는 상상과 함께... 하지만 이렇게 생리가 며칠 늦은 적은 종종 있었고 2년여 내내 임신을 준비해온 나는 ‘프로 실망러, 프로 태명작명러, 프로 상상임신러’ 였기에 항상 기대감과 실망감은 늘 함께했다. 지은이의 부모님들은 올 추석이 잔치겠구나…


 다음날 거짓말처럼 생리가 터졌고 내가 어제 운 것은 질투가 아닌 생리 전 증후군 또는 명절 전 증후군이라 합리화했지만, 지은이를 만났을 때 계속 언급될 2 세 이야기에  표정 관리가 잘 될지는 자신이 없었다.인정하기 싫지만 사실 예전부터 지은이를 여러모로 살짝 질투를 해왔었다. 힘든 일이 없는 건지, 있는데 입 밖으로 잘 안 내 비치는 건지, 지은이의 일상은 언제나 늘 평탄해 보였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여기저기 전화해서 몇 시간씩 떠들기로 푸는 나는 그런 지은이가 내심 부러웠지만, 걔는 솔직하지 못한 스타일이라며 나의 열등감을,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키를 맞춰왔었다.

 며칠이 지나자 친구가 입덧은 없는지 힘든 건 없는지 궁금해 연락했다가 시간이 맞아 지은이네 집에서 보기로 했다. 지은이가 내 앞에서 너무 자랑하면 어쩌나 걱정이 조금씩 밀려왔지만, 나는 대인배다 자기최면을 걸며 괜히 팔자걸음으로 고쳐 걸으며 씩씩하게 지은이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지은이는 얼굴에 핏기없는 파리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고, 컨디션도 영 안 좋고 매일매일 출산에 대한 두려움에 걱정만 하며 지낸다고 했다. 그리곤 나의 방문을 반가워하며 직접 만든 따끈한 카레 밥을 내어주었다. 내 상상과 너무 달랐다. 거들먹거리며 자랑질을 해대는 상상속의 지은이는 사실 찌질한 나의 모습이었을까. 생각과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위로의 말과 응원의 말이 줄줄 해댔는데 그것이 누구를 향한 건지 말을 하면서도 헷갈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척한 너를 보고 나는 안도했을까

 


 나의 샛노랗던 질투는 투명해지고

  아까와 다르게 내 발은 자연스레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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