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파랑과 분홍 속으로
1부 EP15. 수국의 계절
주말 내내 외박을 하면서 수국 걱정을 했다.
사실, 수국을 키우고 싶은 지는 한참 됐다. 몇 년 전 여름, 친구와 간 제주도 여행에서 수국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관심 있게 보게 되었고, 그 오묘한 푸른빛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 뒤로 수국을 키우고 싶었지만 북향집에서 키우는 건 수국에게 너무 가혹할 것 같아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겨울 남동향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드디어 수국 두 포트를 들이게 되었다. '엔드리스썸머'라고 부르는 수국은 이미 배송될 때부터 연분홍색 꽃을 반쯤 피워 놓은 예쁜 녀석이다. 다른 한 포트는 '라댄' 이라는 이름을 달고 왔는데, 검색을 해봐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꽃봉오리만 잔뜩 달고 와서 색깔을 짐작할 수 없었다.
참, 수국에 대한 정보 두 가지. 우리가 예쁘다고 감상하는 꽃 부분은 사실 꽃받침 부분이다. 실제 꽃은 그 안쪽에 자리 잡은 볼품없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국의 색깔은 토양이 정한다. 흙이 산성이면 청색을 많이 띠게 되고, 알칼리면 붉은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수국은 몸집에 비해 너무 작은 화분에 심겨서 왔다. 흙도 처음 심었을 때 말고는 한 번도 갈아준 적이 없는 듯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물을 주면 전혀 흡수될 생각이 없는 듯 곧바로 화분 바닥으로 흘러내려 버려서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물을 줘야 했다. 한 번은 물 주기를 놓쳤는데, 그렇게 포동포동하게 피워놓았던 꽃들이 한순간에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다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다른 식물은 몰라도 수국만은 물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덕분에 바쁜 아침에도 식물들을 꼭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것은 우울한 출근길에 작은 기쁨이 되어 주었다.
목요일 저녁. 외박 전날이 되자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하루만 물을 놓쳐도 다 죽어가는 저 까탈스러운 공주님 같은 녀석을 두고 어떻게 2박 3일을 비워야 할까. 그러다가 문득 저면관수가 떠올라서 그걸 해주기로 했다. 저면관수는 집을 오래 비울 때 사용하면 좋은 방법이다. 화분 위의 흙에 물을 주는 일반적인 물 주기와는 다르게, 화분 아래에서부터 물을 천천히 빨아올리며 화분 전체를 고르게 적실 수 있는 방법이다. 냄비에 물을 받고 거기에 화분을 쓰러지지 않게 잘 세워서 넣고 30분 정도 느긋하게 놓아두었다. 그러고 나면 화분 속 흙이 물을 천천히 빨아올려 두 배로 무거워진다. 화분 전체가 물을 푹 머금은 상태가 되자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주말 동안 잘 있어야 해! 나는 걱정 어린 인사를 해주었다.
주말 동안 외출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수국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엔드리스썸머'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화려한 분홍 꽃다발을 가득 안고 나를 맞이해 주었다. 심지어 다른 꽃대에서도 꽃들이 마저 피어 두 송이의 커다란 꽃송이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걸 볼 때의 희열이란! 그때만큼은 우울함이란 녀석이 나와 동떨어진,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라댄'은 더 엄청났다. 연두색이었던 꽃봉오리들이 하나 둘 파란색 꽃이 되어 나를 반겨주는 것이다. '엔드리스썸머'가 분홍색이라서 살짝 실망했던 나를 위로해 주듯 새파란 색감을 자랑하는 '라댄'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꽃다발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베란다 햇빛을 잘 받는 방향으로 돌려놓아 주었다.
여름이 오고 있다. 수국은 만개해서 어느 골목이든 파랑, 분홍으로 가득 채울 테고, 우리는 그 앞에서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러나 골목의 담 한쪽을 가득 채운 수국들보다 내가 키우는 단 한 포트의 수국이 훨씬 더 예뻐 보인다는 것은 키워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글동글 모여 있던 꽃봉오리가 조금씩 펼쳐지면서 색색깔 꽃잎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대한 나의 우울도 잠시 숨어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