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고 싶지만 놓칠 수 없는 것

1부 EP14. 열기구와 가족

by 에스

엄마와 동생이 이사를 해서 주말에 집들이를 다녀왔다.

이사한 새 집은 지금껏 옮겨다닌 집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 우리 가족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점점 더 좋은 집으로 레벨업을 하고 있다. 맨 처음 기억나는 집은 화장실이 집 밖에 있던 곳이다. 안방과 작은 방, 작은 부엌과 세탁기를 놓고 목욕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나는 밤에 화장실을 가는 게 정말 싫었다. 여름밤에 화장실을 가려고 불을 켜면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펄쩍, 하고 튀어나와서 깜짝 놀라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어린 나는 그 뒤로 곤충을 정말 싫어하게 되었다. 겨울밤에는 추위를 뚫고 화장실에 가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방광이 약해 화장실을 자주 가야만 했던 나는 그 집이 정말로 싫었다.

그러다가 동네가 재개발이 되었고,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듯이 나와서 다음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근처에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시장의 메인 골목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1층 집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 집을 보러 가기로 하던 날부터 집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일단 시장 골목에서 현관문까지 10미터 정도의 골목이 있는데,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우리를 반긴 건 내 엄지손가락보다도 큰 바퀴벌레였다. 시장 안에 위치해 있고, 게다가 1층 집이라 그런지 바퀴벌레가 너무 많이 출몰했다. 거대 바퀴벌레들은 기어 다니지 않고 날아다녔다. 곤충 중에서도 바퀴벌레가 가장 싫었던 나는 이불속에 바퀴벌레가 있지는 않은지 항상 확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집은 2층으로 가게 되었다. 1층보다는 벌레가 덜 나오겠지,라는 생각에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안방 하나에 작은 부엌뿐이라 동생의 방이 없었다. 동생은 밤새도록 컴퓨터로 거친 욕설을 동반하는 게임을 했고, 엄마는 너무 시끄러웠지만 내색하지 못하시고 불면에 시달리셔야 했다.


이렇게 화장실이 집 밖에 있던 집에서 집 안에 있는 집으로, 바퀴벌레가 나오던 집에서 2층집으로 옮기던 우리는 드디어 빌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연식이 거의 내 나이뻘 되는 오래된 5층짜리 빌라의 4층집이었다. 안방과 동생 방이 있고, 지금까지 살던 집 중 가장 넓은 부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화장실 수압은 너무 낮아서 긴 머리를 감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나중에는 모터가 고장 나서 물을 틀 때마다 엄청난 굉음을 냈다. 동생은 책상 하나 큰 걸로 바꿀 수 없는 좁은 방에 구겨져서 살아야 했고, 외풍이 너무 세서 감기를 달고 살았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엄마는 무릎에 물이 찬 상태로 계단을 매일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다.

이사는 대부분 우리의 의사가 아니라 재개발 또는 주인의 명령으로 이루어졌고, 적당한 새집을 찾기까지 엄마와 찬바람이 부는 겨울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전세 전단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입 밖으로 나오던 하얀 김은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셋이 모이는 날에는 밤새도록 보드게임을 한다. 어릴 때부터 윷놀이를 하던 우리는 부르마불이라는 보드게임을 접하고 나서 새로운 신세계에 빠져들었다. 나는 엄마도 익힐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는 보드게임을 하나 둘 사들였다. 엄마는 연세에 비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게임 규칙을 습득하셨다. 우노, 로보77, 스플랜더, 초밥왕 같은 보드게임을 우리는 새벽 3시까지 깔깔거리며 하곤 했다. 그때만큼은 우리 셋 모두 게임을 하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게 논다. 셋 다 지칠 정도로 놀고 나면 동생이 '이제 막판 하자'라고 마무리를 지어 준다. 그리고 나면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린다.

가족, 그건 참 묘한 결속이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인연이 가족 말고 또 있을까.


나는 내 상태를 공중에 떠 있는 열기구로 비유하곤 한다. 가족과 떨어져 나 혼자 있으면 열기구는 나름 잘 떠다닌다. 가끔 휘청이긴 해도, 비행을 멈추거나 하진 않는다. 박과의 사이가 원만하고, 근무가 평소보다 덜 힘들거나,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난 날이면 열기구는 조금 더 높게 떠서 바다 위 하늘을 누빈다. 파도는 치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 비행은 안정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씩, 본가에 다녀오고 나면 나는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벽에서는 냉기가 스며 나오고, 머리도 마음 편히 감을 수 없는 욕실과 그 속에 구겨져서 사는 가족들. 운전면허조차 없으면서도 뭐라도 해서 돈을 벌려는 늙은 엄마.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방황하는 동생. 땅에서는 엄마와 동생이 열기구에 달린 줄을 자신들도 모르게 잡아당긴다. 나는 서서히 추락하고, 결국 난 그 줄에 매여 있는 낡은 열기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한다. 동생이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나가 고양이를 키우는 건 사치라고.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사치를 부린다. 어렸을 적 누리지 못한 것들을 채우기라도 할 듯이. 물건을 사고, 고양이 용품과 사료를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해외여행도 가고. 그러다가 이렇게 다시 현실로 잡혀 오면 잠시 가졌던 모든 기대를 다시 놓아버린다. 내가 뭔가를 누릴 자격이 있었던가. 결국 해외여행을 갔어도 내가 느꼈던 건 오로지 죄책감뿐이었다. 내가 이런 호사를 부릴 여유가 있는가. 무릎에 물이 찬 엄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문을 보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데.

누구를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 또한 사치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붙잡는 줄들을 내려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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