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사이
1부 EP13. 별군에 대하여
별군은 나에게 특별한 지인이다.
우울하고 그 누구와도 대화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순간 걸려오는 전화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찍혀 있다. 그리고 기본 30분에서 길면 한 시간 가까이를 그와 통화하고 나면 어느새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다.
우리는 벌써 11년 지기인데, 실제로 친해지기까지는 무려 3년이 걸렸다. 그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그의 성격이 나와 너무 달라서 내가 거리를 둬서인데,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내가 그와 밥 먹는 자리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이걸 11년째 우려먹으며 서운하다고 놀린다.
어쨌든 서로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둘도 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직장에 어린 여자 신입 한 명이 입사를 했다. 괄괄하고 털털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직장 동료들과 빠르게 친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입을 크게 벌려 환하게 웃는 그녀를 여자 선배 한 명이 싫어하기 시작했고, 곧 그녀와 다니는 다른 동료들까지 가세하여 신입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신입을 자신들이 꾸린 배드민턴 모임에 가입시켜 퇴근 후까지 괴롭혔다. 모임에 소속된 남자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당시 남자친구와의 시간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나는 이러한 일들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연애애만 집중했었다. 그런데 별군은 우연히 이 유치한 모임의 회식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고, 왕따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그녀는 식당 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별군은 그녀에게 다가가 당장 클럽에서 나오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 별군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섯 명의 아웃사이더들이 모였다. 직장 내 왕따를 당하던 신입, 다른 사람들과 일절 교류하지 않던 나, 이른 나이에 임신하여 또래 친구가 없던 아이 엄마, 비정규직 언니, 그리고 이들을 모은 별군까지. 이렇게 모인 다섯 명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일주일에 거의 다섯 번을 모여 놀고, 직장 안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더 이상 신입 아이가 기죽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모이고, 충동적으로 여행을 갔다. 그래서 우리 모임은 '충동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별군이 앞장서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인상은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람을 끔찍이 챙기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처럼 우리는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그가 편해서인지, 그가 나를 이해해 줄거라 생각했는지, 내 비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무덤덤하게 나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또한 내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얻은 상처들을 그에게 말하고 때로는 울음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악의 없는 놀림으로, 웃음으로, 때로는 냉정한 조언으로 받아주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힘들 때에도, 나는 같이 화내고 속상해하고 악의 없이 놀렸다.
첫 남자친구와 긴 연애 끝에 헤어지고 난 후, 나는 한동안 술을 먹을 때마다 많이 힘들어했다. 술을 먹으면 기억이 끊기는 증상은 이 시기부터 심해졌던 것 같다. 매번 정신을 차리게 해서 집으로 보내는 게 힘들 법도 한데, 그는 나를 만나는 일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선약이 있어서 내가 제안한 날에 못 본 날에는 반드시 며칠 뒤에 전화해 다시 날짜를 잡았다.
만나지 않는 기간이 길어져도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전화를 해왔다. 그러면 우리는 침대에 누워 한 시간이 넘게 통화를 한다. 그중에 절반은 나를 놀리거나, 내가 반격하거나 하는 실없는 내용들이지만 내게는 그런 시간들이 이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되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지면서 나는 외부 사람들과 단절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별군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내 상태에 대해 많이 놀라지도, 나무라지도, 죄책감을 가지게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매일같이 메신저로 놀려대고, 잠시나마 나를 피식거리게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해서 긴 통화를 한다. 너무 힘든 날에도, 적어도 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는 힘들었던 상황을 잠시나마 잊고는 한다.
종종 농담처럼 친구들이 얘기한다. 왜 둘은 사귀지 않냐고. 그 말에 별군은 길길이 화내며 날뛰고 나는 그렇게 화낼 것까진 없지 않으냐고 따진다. 그러면 또 투닥거림의 시작이다. 그러면 친구들은 그 꼴을 보며 크게 웃는다. 그러고 나서 얘기한다. 왜 둘은 사귀지 않냐고. 무한 반복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좋은 친구일 것이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가장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다. 그저 나는 우리가 이렇게 앞으로도 죽 살아가기를 원한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지만 생각날 때엔 전화를 하고 2주에 한 번꼴로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방탈출 카페를 가거나 노래방, 볼링장을 간다. 가끔은 우리 둘 다 정말 좋아하는 티룸에도 가고, 불쑥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쁜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도 크게 화내 주고, 욕을 해 준다. 함께 있을 땐 우울증이란 말은 그저 글자뿐인 마냥, 즐겁고 유쾌하다. 그냥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러나 남녀 사이에는 친구란 없다고 한다.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겠다. 가시밭길 같은 현실 속에서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이렇게 웃으며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