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도망치는 방법

1부 EP16. 꿈꾸는 자

by 에스

나는 잠이 정말 많다. 더불어 잠자는 것 자체를 매우 좋아한다. 바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힘들다는 것을 인식하고 난 뒤부터는 잠에 대한 의존이 더 심해졌다. 어떤 날은 저녁 7부터 누워서 잠을 기다리기도 한다. 아무리 잠을 참고 늦게 자려 해도 10시를 넘기지 못한다. 꿈은 마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진다.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주로 일상적인 꿈이나 과거 회상, 주변 사람들이 나오는 꿈 많이 꾼다던데(남자들은 플러스로 군대 꿈까지), 나는 그런 꿈들의 비중이 거의 없는 편이다. 내가 주로 꾸는 꿈들은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다. 꿈들은 즐겁거나, 스릴이 넘치거나, 가끔은 무섭다.


가장 좋아하는 꿈은 하늘을 나는 꿈이다. 어렸을 때는 훨씬 더 자주 꿨는데 요즘은 쉽게 등장해주지 않는다. 꿈에서 나는 장비 없는 아이언맨처럼 몸에 힘을 주고 바닥을 박차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지막한 주택가를 훨훨 날면서 내려다보면 동네는 온통 초록색 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숲인가 싶을 만큼 눈 아래는 초록이 가득하다. 힘을 빼면 밑으로 내려앉고, 다시 힘을 주면 허공을 차오른다. 밤이 되면 풍경은 더욱더 근사해진다. 캄캄한 밤하늘에 빼곡히 별이 박히고, 나는 별에게 닿을 만큼 하늘로 높이 솟아오른다. 힘이 들면 건물 옥상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비행하고의 반복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꿈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들고 거기에 매달려 하늘을 날기도 한다. 실제로 현실에서 비바람이 치던 날 우산을 들고 힘껏 뛰어본 적도 있는데, 어림도 없었다.


액션, 스릴러, 모험, SF 장르의 꿈도 내 단골손님들 중 하나다. 주로 내가 누군가를 쫓거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액션물로 시작이 된다. 세계의 상황은 심각해서, 우주전쟁이 나거나 괴생명체가 침입하거나, 좀비가 등장해서 쑥대밭이 된다. 건물보다도 큰 공룡들이 나타나서 한반도를 짓밟고 다니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과 차를 타고 무시무시한 존재들을 피해 숨죽여 도망치거나 시종일관 뛰어다닌다.

이런 종류의 꿈을 꾸고 일어나면 마치 직접 겪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힘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무척 재미있다. 그리고 나는 빈번하게 죽는다. 한 번은 정면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적도 있는데, 쓰러지는 순간까지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주전쟁 때는 심장에 맞아서 엎어지기도 했다. 죽음과 동시에 꿈에서 깨는데, 헉헉거리며 땀에 절어서 눈을 뜨게 된다.


어딘가를 여행하는 꿈도 참 많이 꾼다. 나는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온 편은 아니다. 일본, 태국, 베트남 이 세 곳이 전부이다. 그래서인지 꿈에서는 유독 해외로 여행을 많이 간다.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이국적인 풍경,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본 적 없는 음식. 나는 어찌어찌 손과 발로 대회를 하며 여행을 즐긴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즐겁게 돌아다니고 술도 먹는다. 꿈에서 깨면 너무 생생해서, 마치 내가 정말 유체이탈이라도 해서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면 다른 평행세계의 내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끝없는 상상력 때문에 꿈의 내용도 풍부한 것 같다.


동물이 나오는 꿈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임팩트 있게 등장한다. 가장 많이 나온 동물은 호랑이이다. 직접 호랑이를 본 적조차 별로 없는데, 이상하게 호랑이는 내 꿈에 자주 등장한다. 호랑이에게 물리거나 죽는 것이 아닌데도 긴장감이 돈다. 호랑이는 어딘가 높은 곳에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나는 도망친다. 사자도 등장했으며, 거대한 뱀을 잡아서 토막 낸 다음 탕으로 끓여 먹기도 했다(맛은 없었다). 몸길이가 5미터도 넘는 새빨간 가오리가 얼음으로 뒤덮인 강물 속에서 헤엄을 친 적도 있다. 나는 얼음 위에 서서 무서움에 떨며 발 밑의 가오리를 주시한다. 동물이 나오는 꿈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소름이 끼치거나 무서운 느낌이다.


그러나 가장 나를 무섭게 하는 것은 바로 엄마에 대한 꿈이다. 엄마는 내 꿈에 좋게 등장한 적이 거의 없다.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테마는 치매와 죽음이다. 엄마는 치매에 걸린 걸 나에게 숨기고, 나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낸다. 또는 치매에 걸린 엄마가 실수를 하면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화풀이를 한다. 실제로 엄마는 건망증이 심하셔서 냉장고와 세탁기를 항상 바꿔 말씀하시거나,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놓고 까먹기 일쑤이다. 나는 엄마의 건망증이 점점 심해져서 치매가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일전에 나는 엄마에게 간단한 치매 테스트를 시켜본 적이 있다. 서로 관련이 없는 낱말 세 개를 보여준 후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가 잠시 뒤 낱말을 기억해 내는 테스트인데, 이 간단해 보이는 테스트를 엄마는 통과하지 못하셨다. 낱말 세 개를 기억하는 게 어렵다니. 하지만 보건소에서 진단했을 때 치매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불안을 내려놓을 수 없다. 그리고 꿈에서 엄마는 자꾸 죽는다. 나는 울부짖으면서 잠에서 깬다. 그리고 눈에서는 진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엄마에 대한 꿈은 정말 싫지만, 그리 자주 꾸지는 않는다. 이 밖에 아주 가끔씩은 일상물도 등장한다. 출근해서 스트레스를 받거나(정말이지 싫다), 대학생일 때 친구들과의 소소한 일상이라거나. 일상물은 자주 꾸지 않는다. 내 뇌에서는 잠을 잘 때 공상과학 필름을 상영하는 쪽이 더 즐겁다고 판단한 듯하다. 나는 현실과 관련 없는 꿈을 꾸며 현실에서 도망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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