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 함께도, 약 없이도 고통인 날들

1부 EP17. 자발적 투약 중단

by 에스

얼마 전부터 식욕 감퇴가 너무 심해졌다. 원체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고 요리도 못하는 나는 밥을 챙겨먹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아예 먹지 않거나 우유에 시리얼, 참치캔에 즉석밥 정도로 대충 때우기 일쑤인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께서 딸이 힘들어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고 우리 집으로 올라오셨다. 엄마는 내가 너무 말랐다며 우리 집에 계신 일주일여의 기간 동안 대장금이라도 된 것 마냥 밥상 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리셨다. 나는 김이 폴폴 나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식욕이 0에 수렴했지만,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며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엄마께서 가시고 나니 밥은 점점 더 먹기 싫어졌다. 그런데 식욕보다도 더 큰 문제는 무기력감이었다. 미친 듯이 바빠질 연말 시즌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업무 처리에 지장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고, 약을 끊어보기로 했다. 우울증을 앓는 내내 무기력감도 같이 겪고 있긴 했지만, 약을 먹으면서 훨씬 더 심해진 걸로 봐서 약 부작용일거라 판단했다.

실제로 약을 끊고 나니 며칠간은 무기력함이 조금 사라진 것 같았다. 퇴근 후에도 의욕이 있어서 무려 미뤄뒀던 독서도 하며 뒹굴뒹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주일 정도 지나자 무력감은 물러갔지만 그 자리를 우울함이 가득 채워버렸다. 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아예 인생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에 다시 사로잡혔다. 약을 먹을 때에는 저녁 8시에 잠들었는데, 약을 먹지 않으니 저녁 6시부터 누워 있게 되었다. 퇴근해서 씻고 대충 저녁밥을 때우고 나면 곧바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근무 중 무기력함을 줄이기 위해 아침에 먹던 약을 저녁에 먹어보기로 했다. 저녁에 먹고 나면 잠을 자기 때문에 조금 낫지 않을까,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너무 힘들다. 약과 함께 사는 것도 힘들고, 약 없이 살기도 힘들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지난 금요일에 정신과를 방문했지만 아뿔싸! 전화를 미리 해볼 걸. 월요일까지 휴진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꼭 전화를 하고 가야겠다. 일단 의사 선생님의 도움 없이 이번 주와 다음 주를 살아가야 한다. 너무 두렵고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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