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Oct 20. 2021

어른에게도 분리불안이 있다.

'괜찮아, 너도 많이 무서웠지?'

큰아이가 6살이 넘어서도,

작은 아이가 5살이 넘어서도 

가정보육을 하고 있는 나에게

사람들은 두가지 말들을 던진다.

'와, 대단하다. 근데 구지 왜요?'

'와, 대단하다.  엄마 안힘들어요?'

다른 말 같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어린이집 보내는게 힘들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득 채워 보내고 싶다는 말로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아이랑 떨어지는 순간

내가 아이를 '버리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싫다.

어릴적 상처의 흔적처럼,

내가 정서적으로 버려졌던 그 상황을 

다시 내가 겪는것이 너무 싫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어릴적 받은 내가 상처받았던 상황을

내 머리는 기억할지 못할지라도, 

내 몸은 정확히 기억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 뿐이다 라고

아무리 되내어도

아이가 내게서 떨어지는 순간

울고불고 할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너무 힘이든다.

버리는 것이 아님에도.

그저 어린이집에 아이를 잠깐 맡겼다가

데리고 오는 것 뿐인데도.

아니 사실은 '맡겼다'라는 

그 표현조차 힘이듬을 인정해야겠다.

외할머니집에 맡겨지고,

이모집에 맡겨지고,

할머니집에 맡겨졌던 그 순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을 그 아이가 겪었던 

그 그리움과 두려움이 

아직까지 내 마음안에 남아 있음이 느껴진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엄마가 나를 외할머니집에 맡겼던 그 순간,

5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가

긴긴시간 엄마를 기다렸던 그 순간처럼

내 눈앞이 지금도 캄캄해진다.

어린이집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예상치못한 상황에 

새로운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돌아오는 오늘.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내 눈을 짖눌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은 내가 두려워서 데리고 있었던 것인데,

마치 큰 철학과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양 떠들어대고 온 내가

너무 수치스러워서일까?

하나같이 엄마와 일찍 떨어지면 좋다고 얘기하는,

입을 맞춘듯 말하는 기관 원장님을 만나고 오면

늘 이렇게 머리가 아프다.

나의 불안을 건드리는,

나와는 상반되는 에너지가 여전히 나는 힘든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서,

자신의 틀에서 이야기한다.

어린이집에 일찍 온 아이들이 적응을 하며 

분리불안을 겪고 

잘 적응하는 모습을 봐온 선생님들에게

어쩌면 '엄마랑 빨리 떨어질 수록 좋다'는 

그 말이 그들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어쩌면 그 말이 진실일 수 도 있다.

하지만, 내 몸은, 내 경험은 아니란다.

엄마의 사랑, 아빠의 사랑,

가족안에서 충분히 사랑 받고 세상에 나간 

아이의 힘이 얼마나 큰 지 

내 경험으로, 내 아이의 경험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자신이 없나보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내가 거짓일까 두렵고 아직 사람들이 시선이 두려운걸 보면.

나의가치를, 나의 생각을 

여전히 평가받을까봐 두려운 내가 있나보다.

다른 사람과의 에너지만 섞이면

여전히 내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내가 있나보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가 세상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당했던 기억.

'내가 이상해'라는 그 느낌.

그 수치심에 내가 반응하고 있음을 느낀다.

결국은 내가 그 사람을 설득하고 싶었구나.

내 말을 증명하고 싶었구나.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나임을 깨닫는다.


당신 말이 맞다고 인정해주는 척하면서

여전히 내 생각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고 싶었음을.

그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에도

나는 또 상대에게 '내가 맞아!!'라는 모르게 폭력을 쓰고 있었다.


증명할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이

내가 나를 인정해 주면 되는데.

'그래 맞아'

'너는 너, 나는 나.'

각자의 가치관을 인정해주만 그만인 것을.


내 육아에서 핵심 문제.

'분리불안'

엄마와 떨어져서 불안했던

 내면아이나 더 많이 안아줘야겠다.

지명아.

엄마 없어서 외로웠지.

엄마 없어서 무서웠지.

엄마 많이 보고 싶었지.

응 ㅜㅜ

엄마가 안올까봐 너무 무서웠어.

아직 내 안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두려워하고 있는 내면아이가 느껴진다.

첫째때 흘려보내지 못했던 그 내면아이가 

둘째때 다시 반복하며 올라오고 있음을.


내 안에서 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첫째를 낳아도, 둘째를 낳아도, 셋째를 낳아도 

반복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문제들은

나 스스로 속박하는 문제에서

해결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괜찮아,

불안해해도 괜찮아.

충분히 불안해하고 흘려보내본다.

그렇게 나를 잃지 않는다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임을 또한 잘 알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되는 불리불안이 있다.

그런 자신을 꼭 안아주길.


작가의 이전글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은 줄 알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