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상대가 원하는 역할이 선생이 아니였는데
윤찬이와 나란이 파마를 했다.
우리 완전 직모인 윤찬이는 곱슬 곱슬 파마를,
곱슬기가 심한,
머리가 길면 길수록 레고 머리가 되어 늘 신랑이 원성을 사는 내 머리는
매직을 하기 위해서 미용실에 갔다.
나란히 앉아서 머리를 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와 이럴때가 오는구나.
아들과 나란히 머리를 하게 되는 '때'라는게
드디어 나에게도 왔구나,,
순간 감동이 밀려온다.
그렇게 어여쁘게(?) 머리를 했다.
그리고 어제 파마를 하고 윤찬이가 다니는 학원 선생님을 만났는데
늘 완벽주의에 열정을 다하는 선생님께서
대뜸 한 말씀을 하신다.
'윤찬이 머리 파마했네요~~ 머리를 옆에 조금 덜 쳤으면 더 좋았을텐데'
별 의미 없는 말이고,
어쩌면 아쉬움의 표현이였겠지만,
돌아 오는 내내 그 말이 내 머리속에 맴돌았다.
늘 좋은점 보다는 개선할 점을 알려주시는 선생님이다.
나의 인정욕구가 큰 것인지,
선생님의 칭찬이 야박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형편 없이 늘지 않는 실력때문인지
늘 선생님 말씀에 '좌절'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돌아오곤 한다.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나 나름 아이의 손을 잡고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지만,
늘 기대에 못미는 듯한 상황에 대한 좌절.
그 좌절에 대한 외상으로 몇날 몇일을
생각에 골똘이 빠져있을 때도 많다.
아이의 상태를 평가하는 듯한 말들이
자꾸 나를 평가하는 말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편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가 아이에게
해주고자 했던 육아관과 자꾸 부딪치니 괴롭다.
특별히 고쳐주어야 할 것 보다는,
있는 것을 끌어내주자 마음먹었던 육아였다.
그런데 이 선생님과 수업을 하다보면
자꾸 아이의 부족한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집중'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선생님의 태도에 대해서 왈가불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보완할 점'에 대해 집중하고 알려주시는 모습을 보며,
그 동안 나는 타인에게, 아이에게
과연 어떤 태도로 살았을까가 궁금해 졌다.
어쩌면 부족한 부분을 끊임 없이 지적하고
좀 더 나은 무엇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선생님의
직업적 사명이고 역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누군가의 선생님이 아니였던 나,
누군가의 아내이고, 누군가의 엄마이고, 누군가의 친구였던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선생'처럼
가르치고 보완하고 알려주려고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에 으스대고,
좀 더 살아봤다고 지적하고,
좀 빨리 경험했을 뿐인데 마치 다 아는 것 처럼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 얼마나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 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라는 것에 '마음'이 없다면,
'말'이라는 것에 상대의 '영혼'을 이해하고자 하는 애씀이 없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문자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아프게 하는
'날카로운 도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했던 말들.
사랑이 아니였던 말들.
겉만 번지르르했던 말들은
어쩌면 이해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들의 마음 한 구석을
저릿저릿하게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유능함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 곁에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무능하다 느끼게 되는 사람들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기도 한 것 같다.
자신의 유능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말을 사용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조언해주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날개가 꺾여진 느낌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생각없이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가,,
듣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참 작게 느끼게 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말 한마디가
그들이 느끼는 전부 일 수는 없겠지만,
좀 더 다정하게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쉽기도 하고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그 과정에 중에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원하는 위치가 무엇인지
여전히 헷갈릴 때가 많다.
나의 포지션. 나의 위치. 역할.
부인인지 선생인지
엄마인지 선생인지
친구인지 선생인지
포지션에 맞게 행동하는 법이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쓰임에 맞게 활용하는,
<나 사용법>을 스스로 터득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 '도움'은 '내가 주고 싶은 도움'일 뿐,
상대가 원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늘 상대가 내게 원하는 것이
어떤 시점에서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 대한 대안 제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이였을 뿐
상대가 원하는 것은 아니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을 멈추게 해주는 것만이
상대를 위한 행위는 아니다.
때론 슬픔에 머무를 수 있게
옆에 그저 앉아있는어 주는 것.
그것만이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역할의 전부일 수도 있다.
내편이 있다는 그 든든한 마음만으로도
상대는 자신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늘 누군가에게 선생이 되려고 했다.
심지어 아이에게 조차도 나는 선생이고 싶어했다.
내게 따뜻한 품을 바랬던 신랑에게도차 가끔은 꼰대짓을 하고 있었음을.
그래,
나는 이제서야 상황에 맞는 역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서 내가 집중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드러냄과 겸손함.
수다스러움과 침묵.
때로는 숨죽여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