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간 사람의 발걸음을 똑같이 따라갈 수 없다.
'신중하게 생각해'
'이성적으로 살자'
수많은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성의 틀에 묶여있다. 개인이 가진 에너지와 감각이 모두 다른데 단 하나의 활자화된 결론으로 살라고 세상은 강요하고 있다. 정답은 남이 정해준 정답이다. 그 정답지는 자연과학을 위한 인과관계가 분명것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있다. 사회라는 곳은 수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에너지와 감정 그리고 느낌으로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는 화개장터 같은 곳이다.
우리가 시장에 간다고 생각을 해보자. 모든 시장 상인들이 말하는 상품에 대한 홍보를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가정하자.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한체 감각기관으로 수용되는 모든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믿는 이성이라는 것은 사실 허상이다. 우리의 학교교육은 수렴화된 정답을 고르는데 익숙하다. 수능 영어를 봐도 수능 국어를 봐도 답은 하나다. 다양한 해석을 자기 에너지와 감정에 따라서 분출하는 것을 죄악시 여긴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30년 전보다 더 풍족하고 굶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최신의 의료기관과 사회문화적 인프라는 너무나도 완벽하다. 그런데 자살률은 세계1위고 행복지수는 바닥을 치고 있다. 그것은 '감정공명'에 이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감정공명? 자신의 발화되는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이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이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 정보의 확산과 발산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내면안의 그러한 '감정공명'의 에너지를 발산하기를 주저한다. 혹시나 그것이 '오답'으로 취급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통념을 '이성'이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공명을 무시한채 따르고 살아간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는 삶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면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파민 중독으로 빠진다.
이성은 없다. 그것은 허상이다. 자연과학 질서외에 존재하는 이성은 없다. 우리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감정공명에 대해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이것을 볼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이 감정의 원인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냥 그 자체의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다. 감정에 인과관계를 붙이는 순간 그것은 에고가 되고 그 에고는 타인의 길을 따라가도록 강요한다. 감정이 주는 촉. 이것을 육감이라고 표현한다. 설명하지도 논리적으로 구성하려 하지마라. 그것의 순결한 무형체의 공감각적인 그 자체를 가만히 느끼고 바라본다. 그 감정이 주는 행복감이 지속이 되고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다면 그대로 해라. 우리는 핡퀴어진 엉겅퀴에서 이제 첫발을 뗄 수가 있는 것이다
가장 행복하게 사는 첫번째 길. 그것은 직관을 여는 것이다. 직관은 설명없는 감정에서 그 시작이 일어난다. 설명없는 감정에서 그 감정의 기운을 따라서 말하고 쓰고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해나가는것이다. 그러다보면 같은 감정선을 가진 사람들이 따르게 되고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공명을 전달하면서 거대한 하나의 진리를 자신이 만들게 된다.
유튜브의 정보과 책의 정보는 결이 다르다. 유튜브는 일방적인 지식의 압축을 논리전개를 통해서 강요한다. 책은 작가의 감정선이 흘러가는 대로 논리적 회로와 감정선 회로가 동시에 발현이 된다. 책을 보면서 지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감정공명을 느낀다. 그것이 울림이다. 이런 울림을 받는 연습을 하면 자신도 울림을 하고싶은 욕망이 생긴다.
이것이 직관의 발현의 시작이다. 모든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관만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존재안에서 자신의 발현을 시작할뿐이다. 지금 내가 쓰는 이글도 어떤 개요도 체계도 없다. 내 마음의 직관이 쓰는대로 타자를 칠뿐이다. 그것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