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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뜻지 Feb 27. 2023

보내는 이름, 받는 이름

헤어짐과 만남이 공존하는 2월의 풍경

 2월의 학교는 한 공간 안에 떠나는 사람과 새로운 사람이 공존한다.

 떠나는 사람의 짐과 새로운 주인의 짐이 뒤섞인 교실은 그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오전에는 전입교사 환영식이 열렸던 강당이, 오후에는 송별회와 명예퇴임식이 열리는 장소가 된다. 올해 우리 학교로 새로이 전입한 선생님들이 첫 인사를 했던 무대가, 긴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선배교사의 마지막 무대가 된다.


보내는 이름

 선배 교사가 30여 년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임하셨다. 나는 작년에 이 학교로 적을 옮겼고, 그 분과는 학년으로도 업무로도 큰 관련이 없어서 깊은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10년 이상 인연을 맺었다는 다른 선생님들에 비하면야 거의 남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분을 떠나보내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오며 가며 가벼운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지만, '저런 분이 내 담임 선생님이셨으면 참 좋았겠다.', ' 저 선생님과 함께 동학년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내내 했기 때문이다.  

 맑은 눈에 소녀 같은 자태를 지니신 선배는 웃지 않아도 웃는 표정을 지니고 계신 분이었다. 진짜 소리 내어 웃을 때는 당신이 가르치시던 8살 같은 천진한 표정이 나오셨다. 예순이 넘은 연세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은, 온화하고 정다운 어른. 내 꿈인 ‘마지막까지 담임교사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퇴임하기’를 이루신 분. 나의 롤모델, 항상 평안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몰래 존경하던 이름을 보내드리며 바람이 생겼다. 나도 그처럼 내 안의 아이를 지키고, 나를 떠나보내는 이에게는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맑은 눈을 지닌 다정한 할머니가 되어야지.

선배의 마지막 선물. 소녀 같은 자태의 비밀은 이 산삼이었을까. 한 뿌리씩 먹다 보면 곧 개학일이다. 건강관리 잘하고 건강하게 3월을 맞으라는 깊은 뜻일까?




받는 이름

 새로 맡은 새 학년의 새로운 학급을 뽑았다. 내가 뽑은 학급 봉투 안에 스물네 명의 이름이 가지런히 적혀있다. 10초도 안 되는 순간에 1년의 인연이 결정된다. 나보다 한 해 먼저 이 아이를 맡았던 동료 선생님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그가 작년에 받은 이름을 올해는 내가 받았다.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은 선생님과도 우리가 받은 '이름'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새로운 아이의 이름을 보면서 몇 해 전 맡았던 다른 아이의 이름, 잊고 지내던 옛 동창의 이름이 떠올라서 문득 감상에 젖기도 한다. 새 학기를 준비하는 동안 책상 이름표, 학급 게시물, 체크리스트를 만들면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열한 살 아이의 이름을 수십 번도 넘게 타이핑한다. 내가 받은 이름. 내게 와준 이름. 내가 선택한 이름.


 교실 이삿짐을 정리하며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한다. 원체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한동안은 구질구질할 정도로 짐이 많았다. 해가 지날수록 늘어나는 짐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곧잘 처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름'이 담긴 것은 아직까지 버리기가 힘들어서, 집으로 '이름' 한아름을 또 가져온다. 작년 이맘때쯤 학급편성표에서 이 이름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아이가 일 년 후 내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를.



 

수놓은 이름
서도호, <Tangled Man(뒤얽힌 사람)>
일생 동안 대략 3,000명의 사람을 알게 된다고 믿는 힌두교 철학에 흥미를 느낀 작가는 가족, 친척, 친구의 서명, 전시회 방명록 등에서 3,000여 개의 서명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를 활용하여 환생과 업보, 인연과 같은 철학제 주제를 다루는 다양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인연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담겨 있는데, 각각 다른 서명에서 시작된 색색의 실들이 한 사람에게 회오리처럼 얽혀 있다.   - 작품 설명 발췌 -

 

 내가 보내고 또 내가 받은 이름.

 어떤 이름은 보내기가 아쉬워 길게 수를 놓는다. 내가 퇴임할 때까지 선배의 이름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면 굉장히 많은 양의 실이 필요할 테지. 강렬하고 짧게 지나간 인연은 빨간 털실로 그 이름만 작게 수놓을까. 3000명 까지는 못했지만, 곁을 스쳐간 수많은 인연의 길이와 색을 대략 가늠해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떠올린 그 이름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한다면, 그의 도화지에는 나를 어떤 색과 모양으로 수놓았을까. 나의 이름은 그에게 아직 유효한가. 수놓기를 멈추었다면 그 끝은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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