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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May 20. 2020

002.엄마, 예쁘다고 믿기로 하다

       

 

 “엄마가 객관적으로 예쁘지는 않지.”

 “그럼 네가 본 사람 중에 예쁜 사람은 누군데?”

 “음... 엄마?”    


 아들은 말장난을 즐긴다. 아기 때부터 그랬다. 두 돌, 갓 입이 트여서 두 단어로 문장을 만들던 때에 라임 있는 말대꾸를 했다. 이를테면 “일단 씻자”라는 내 말에 “일단 TV 보자”라는 식으로. 그런 아들이 만으로 5세가 되니 팩트로 엄마를 들었다 놨다 한다. 사실 나에게 예쁨과 못생김은 농담 이상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나는 종종 나같이 못생긴 것을 이 작고 예쁜 아이가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곤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못생기지는 않다. 건강관리공단이 제시한 평균의 키와 표준체중의 범위 안에 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무척이나 못생겼고 뚱뚱하다고 강박적으로 믿고 있다. 육신으로 돈을 버는 직업에 종사하지도 않으면서 음식과 운동에 지대한 신경을 쓴다. 다이어트 약을 지으러 갔다가, “정상 체중이므로 약을 지어줄 수 없어요.”라는 양심 있는 의사 선생님을 조우한 적도 있다.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쓴다기보다는 뚱뚱해지거나 더 못생겨지면 불행이 닥칠 거라는 망상을 빠져 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혹은 예뻐지거나 홀쭉하게 마르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앞서 말한 망상의 역이 참일 것이라는 논리적인 오류도 범하고 있다(사실 내 얼굴 골격은 이미 미인의 비율을 갖고 있지 않다). 즉 나는 못생긴 게 아니라, 못생겼다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정신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내가 못생겼다는 믿음의 기원을 정확하게 추적하기는 어렵다. 어른들로부터 못난이라고, 아기 때부터 코가 낮아서 빨래집게를 꽂아두었더니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는 놀림을 받은 것, 단정한 의복이나 신발을 살 자원을 내게는 할당하지 않는 부모님을 위해 남동생이 입던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다닌 패션 암흑기의 사춘기를 보낸 것 등 외모에 관해 불행으로 각색된 기억은 많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가난한 시절을 거치신 분들이라서 자녀에게 최저생계비 이상의 지출을 하지 못한 것이니 당신들의 잘못은 아니며, 나의 각색된 기억인 만큼 신뢰도 확보도 어렵다.     

 

 하여튼 못생겼다는 신념 때문에 대학 시절에 미팅이나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다. 미팅이라는 말만 들어도 나는 너무 못생겨서 아무도 나를 파트너로 지목하지 않는 참사를 당할 거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내 지역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국립대학에서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지만 나 자신이 못생겼고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게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괴로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즉 나는 외모에 대해서만 건강하지 못한 정신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자체에 대해 건강하지 못한 정신상태였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20년 전은 하필 젊은 남녀 연예인이 우르르 나와 짝을 짓는 예능 프로가 유행하던 때였다. 특히 연예인이 아닌 예쁜 일반인 여자 출연자가 큰 관심을 끌었는데, 나는 그녀가 예쁘니 모두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는, 내게 이성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남자 학우들에게 ‘못생긴 나에게 대체 왜?’라는 강한 불신을 가졌다.         


 그 후로도 나는 여전히 못생긴 나라는 신념을 고수하며 살았다. 그런데 한낱 망상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작 중요한 그것은, 역행할 수 없는 아들과 나의 한 번뿐인 시간을 사진에 담을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것.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시기가 되니 확실히 유아가 아니라 아동이다. 돌 때까지 아들을 안아서 재웠는데, 그때 아들은 내 가슴팍에 엉덩이까지 쏙 들어왔다. 아기였던 아들의 얼굴에 내 볼을 부비면 내 볼에 온 머리가 다 느껴질 정도로 작았는데, 이제는 제법 뺨과 뺨이 맞닿을 정도로 자랐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와 살결이 닿았을 때의 촉각적인 기억은 재생이 되지 않는다. 내 품에 안긴 아이의 사진이라도 있다면, 그 아이가 나에 비하면 얼마만 한 크기였는지, 그때 나는 기분이 어땠을지를 시각적으로나마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진이 없다.     


 출산 후 퉁퉁 부은 모습으로는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못생겼다고 생각되는 내 모습이 더 추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들 단독 사진만 찍었다. 아들이 유아기 막바지인 7세 후반에야, ‘신생아였던, 유아였던, 아동이 된 아들과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함께 했는지를 사진으로 남겨두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 후로는 산책을 해도, 여행을 해도 나는 셀카 모드로 우리를 찍는다. 내 얼굴 크기에 비해 아들의 얼굴은 얼마만 한지, 내 키의 어디 만큼에 아들이 오는지를 눈으로 보니, 내 앞에 아들이 실존해 있는데도 사진 속의 커가는 아들이 새롭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진짜로 못생기지가 않다.          


 이상한 건, 내 눈에 내가 못생기지 않은 후로는 모두가 나름의 잘생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잘생김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비율을 가진 이목구비나 신체가 아닌 사람 자체의 무언가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못생기지 않았음을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왕 시작한 거, 예쁘다고 믿기로 했다.     


 그래, 나는 예쁘다. 예쁜, 너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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