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중 P60~67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 <낙화>의 시작이다. 떨어지는 꽃잎 아래에서 결별하는 두 연인을 묘사하였다.
인간의 삶은 관계의 연속이다. 관계의 구성은 만남과 지속과 헤어짐이다. 관계란 또한 얼마나 무수하게 깊기도 얕기도 간단하기도 복잡하기도... 한가. 그로 인해 관계마다 다른 감정의 의미.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상대방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1949년 칠레 태생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군사 정권 하에서 반독재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다 수감되었고 피토체트를 피해 도망쳤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며 유네스코 기자로 활동했다. 이 작품은 1989년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는 소설이다. 출간과 동시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밀림에 적응하고 그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는 고양잇과 맹수들처럼 단단한 체격과 날렵한 순발력을 발휘하여 수아르 족 못지않게 짐승의 발자국을 뒤쫓을 수 있었고, 수아르 족 못지않게 헤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밀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충분히 갖추었지만 수아르 족은 될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수아르족이었으나 동시에 수아르 족이 아니었다. 수아르 족이 아니었기에 일정한 시기가 돌아오면 그들의 부락을 떠나 혼자 지내야 했다. 물론 그에게는 서운한 일이었지만 수아르 족 인디오들은 차라리 그가 수아르 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근히 반겼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와 다시 만나는 순간에 그간에 보고 싶었던 감동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갔다. 그는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는 동안 그 부락의 비밀과 의식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죽은 자 들의 오그라든 머리를 향해 치르는 제식도 있었는데, 그는 산 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여 죽은 자의 용기와 죽은 자의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송가 <어넨트>를 불렀다. 또한 그는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결정한 부락의 노인들을 위해 베푸는 고결한 의식에도 참여했다. 그들은 임종을 앞둔 노인이 치자 즙과 나 테마 즙을 마시고 그 효과로 이미 예정된 내세의 문을 통과하는 동안 스르르 잠이 들면 그 육신을 부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서 온몸에 달콤한 종려나무 꿀을 바르고, 그다음 날 죽은 자로 하여금 저 세상에서 현명한 나비나 물고기나 동물로 다시 환생하길 축원하는 어넨트를 읊조리면서 밤사이에 개미들에 의해 완전하게 육탈이 된 하얀 분골을 수습했다.
<중략>
다시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가리트사 강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시간이 아마존 유역 어딘가로 달아나 버린 것 같은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무지막지한 문명이 서쪽으로부터 아마존의 거대한 몸집을 파헤치며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기계들이 길을 낼 때마다 수아르 족은 그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은 이미 한 곳에서 3년 동안 머물던 관습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3년이란 기간은 자연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들은 오두막을 철거하고 죽은 영혼들의 유골을 챙겨 여전히 처녀림을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지역을 찾아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난 가트 리사 강 유역으로 이주민들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주 정책 초기와 달리 목축지와 임업 지를 불하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일정한 목표도 없이 오로지 일확천금을 노리고 찾아든 노다지꾼이나 술을 들여와 의지가 약한 이주민들을 타락시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간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입으로 부는 화살이 목표물을 벗어나자 자신이 늙었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떠날 때가 되었던 것이다. 그날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엘 이딜 리오에 정착해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수아르 족과 생활했지만 그들처럼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고 환각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거나 그들처럼 자신의 육신을 개미들에게 갉아먹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고, 설사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슬퍼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의 불길한 예언은 의외로 빨리 현실화되고 있었다.
그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물론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는 그 총소리가 자신을 떠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신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를 들었다.
총소리가 난 쪽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간 그는 그곳에서 울고 있는 수아르 족 인디오들을 보았다. 그들은 떼죽음을 당한 채 강물 위에 떠 있는 물고기 떼와 강변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일단의 외지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섯 명의 백인 노다지꾼들이었다. 그들은 길을 낸답시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서 물고기 산란장인 저수지의 둑을 폭파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인디오들이 몰려오자 두렵고 당황한 나머지 총을 난사하며 배를 타고 도망쳤던 것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백인들이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곧바로 지름길을 달려간 인디오들이 미리 길목을 차단한 채 입으로 독이 묻은 화살을 불어 도망가는 백인들을 해치운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백인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그곳을 빠져나갔고, 헤엄을 쳐 강을 건너자마자 숲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그는 총에 맞은 두 명의 수아르 족 인디오를 살피고 있었다. 한 인디오는 근거리에서 쏜 산탄에 머리가 깨져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또 한 인디오는 가슴 부위가 열린 채 가쁜 숨을 몰아시면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친구 누 시뇨였다.
"더럽군, 이런 식으로 떠나야 하다니..."
누 시뇨는 고통을 참아가며 눈빛으로 화살집에 든 독화살을 가리켰다.
"나는 차분하게 떠나지 못하고 숲에 부딪치고 만 거야. 눈이 먼 슬픈 새처럼 말이지... 그러니 자네가 도와주게나, 친구..."
이어 누 시뇨는 주위에 몰려든 동료들을 차례대로 쳐다본 뒤, 그리고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에게 뱀에 물렸을 때 수아르 족 인디오들이 도와준 빚을 갚아야 할 순간이 왔다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즉시 화살집을 챙겨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넜다. 도망친 백인은 체념 상태에서 너무 많은 흔적을 흘렸던 터라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몇백 걸음도 못 가서 발견된 노다지꾼은 잠든 보아뱀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했소? 무슨 까닭으로 총질을 했느냐, 이 말이오!"
그는 총을 겨누는 백인을 쳐다보며 차분하게 따지듯이 물었다.
"야만인, 그 야만인들은 어디 있지?"
백인은 대답 대신 그에게 총을 겨눈 채 물었다.
"다들 저 강 건너에 있으니 더 이상은 뒤쫓지 않을 것이오."
백인은 그 말을 듣자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수아르 족이 아닌 수아르 족의 입으로 부는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노다지꾼은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결과가 그렇게 되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아르 족이 아닌 수아르 족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백인의 손에서 가까스로 엽총을 빼앗아 손에 넣었다.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무기였다. 하지만 그는 백인이 손을 뻗어 낫 칼을 찾아 더듬거리자 본능처럼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눈앞에서 탄음에 놀란 새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총소리에 놀라기는 수아르 족 아닌 수아르 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떨결에 백인에게 다가갔다. 복부에 두 발을 맞은 노다지꾼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는 백인이 내지르는 비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목을 붙잡아 강가로 끌고 갔지만, 이제 막 백인을 안고서 헤엄을 치는 순간에 그가 죽었다는 것을 느꼈다.
건너편 강가에는 수아르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도와 노다지꾼의 시체를 강기슭으로 끌어올리던 인디오들은 탄식과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누시뇨 때문에 울고 있었던 것이다.
사아르 족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생활했기에 수아르 족이나 다름없던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그렇게 해서 마침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만일 그가 백인인 노다지꾼에게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준 다음 독화살로 끝장냈더라면 죽은 백인의 얼굴에 그 용기가 남아 누 시뇨가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총을 맞았기에 백인의 얼굴에 놀라움과 고통에 일그러져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누 시뇨의 영혼은 눈이 먼 앵무새로 날아다니다 나뭇가지에 부딪히거나 잠이 든 보아뱀의 꿈자리를 사납게 만들어서 그들의 사냥을 방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과 수아르 족의 명예를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친구 누 시뇨에게 영원한 불행을 가져다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작별의 눈물을 흘렸다. 수아르 족 인디오들은 먹을 것과 카누를 내주면서 앞으로 그는 반갑게 맞이할 수 없고, 그들의 부락에 들르는 것은 가능해도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말했다.
수아르 족 인디오들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의 카누를 밀어 준 뒤,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발자국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