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종종 거북이와 나무를 보며 멈춰 섰다.
그들의 고요한 움직임과 침묵 속엔,
무언가 인간과는 다른 영원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거북이는 느렸다. 하지만 그 느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시간에 지지 않는 품위처럼 느껴졌다.
등껍질 하나에 세월을 말없이 짊어진 채,
그저 묵묵히 존재하는 자세.
나는 그 속에서 이상한 위로와 부러움을 느꼈다.
“어쩌면 이 생명은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지도 몰라.”
거북이의 눈동자에 담긴 무심한 깊이는
어린 나에게 마치 불사의 지혜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는
시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 같았다.
계절이 오고 가고, 사람들의 발길이 스쳐가도
나무는 변하지 않고,
그저 조금씩 자라고, 조금씩 굵어지고, 조금씩 상처 입었다.
나는 그런 나무를 보며
살아 있다는 것의 무게와 위엄을 처음으로 느꼈다.
아이였던 나는 종종 생각했다.
“왜 나는 거북이처럼 오래 살 수 없을까?”
“왜 나무처럼 모든 것을 지켜볼 수는 없을까?”
그 물음은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
내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막연한 공포의 반사였다.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거북과 나무는 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나보다 오래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에 깊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켰다.
거북과 나무는,
단지 오래 사는 생명체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상징이었다.
나를 불안하게 했던 죽음과 유한함의 개념을,
그들은 말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깊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지금 돌아보면,
거북과 나무는 나에게 철학의 시작점이었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시간이란 무엇이며,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 두 생명체 앞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북과 나무는 결코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명력 뒤에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환경에 짓눌리고, 부식되고, 상처받는 시간이 있었다.
껍질과 나이테가 오래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역시 고통과 회복의 기록이었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영생처럼 보이는 그늘 아래에도
“살아 있다는 것의 무게”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거북의 늙은 등딱지에 스며든 균열을,
나무의 수피에 남은 흉터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거북처럼, 나무처럼 오래 살 수는 없지만,
그들의 껍질과 나이테가 기록한 삶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부러움과 두려움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삶의 유한함을 자각하고,
타인의 진정성을 믿으며,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생의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