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그토록 좁은 세계에 안주하려 하는가. 왜 그들은 자신을 “음악을 좋아하는 마케팅 전공자”나, “경제 유튜버이자 여행 블로거” 같은 식으로 말하는가. 왜 관심사는 두세 개로 압축되고, 그 압축 속에서만 살아가야 안심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패키지’가 되기를 요구받는다. 우리는 이력서, 자기소개서, 링크드인 프로필 등에서 자신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설명은 곧 상품 설명서와 유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심사와 능력을 좁히고 압축한다. 왜냐하면 시장은 “특정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지, “세계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다기능 복합기보다 고속 흑백 복사기를 찾는 수요와 비슷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궁금했다. 공기의 흐름이 왜 소리를 만들며, 지진이 땅을 흔들면서도 별자리는 바뀌지 않는 이유, 사람의 감정은 왜 같은 말을 듣고도 달라지는지— 이런 질문들이 나를 끌고 다녔다. 어느 날은 철학자의 방에 앉아 있고, 다음 날은 프로그래머의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가끔은 음악가의 악보를 훔쳐보듯 바라보았다.
나의 마음은 방대한 도서관 같았다. 어제의 역사책 위에 오늘의 뇌과학이 놓이고, 철학의 장과 경제가 한 페이지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럴수록 나는 ‘나’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세상은 단순하게 말하는 사람만을 신뢰했고, 나처럼 다면적인 호기심을 가진 자는 “애매하다”, “방황한다”, “선택을 못했다”는 평가 속에 갇히기 쉬웠으니까.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정말 단 하나의 관심사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가?
세상은 왜 사람에게 ‘간결한 정체성’을 강요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사회가 모든 인간을 ‘상품’으로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런 분야에 강합니다.”
“저는 이 가치관을 지향합니다.”
“저는 그쪽은 잘 몰라요.”
그 말들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단순화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은 달랐다. 그들은 하나의 분야에 갇히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과학자이자 화가였고,
수학자이자 해부학자였으며, 기계공학자이자 음악가였다. 호기심은 능력이자 존재의 증명이었고, 지식은 서로를 감염시키며 시를 쓰고, 건축을 설계하고, 과학을 태동시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하지 않았다.
“저는 화가라서 기계는 안 해요.”
“해부학은 제 전공이 아니라서요.”
그는 세상을 분리하지 않았고, 자기를 합성체로 존재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문화된 분업 체계는 한 가지 영역에 몰입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구조를 먼들었고, 시간과 에너지는 단가화되어 어디에 집중해야 가장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나만을 탐색했다. 모든 가치는 돈과 종속되는 비극을 겪었다. 또 “나는 누구인가?“보다는 “나는 무엇을 팔 수 있는가?”에만 집중하여 오히려 자신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다양한 관심은 ‘산만함’으로, 좁은 전문성은 ‘신뢰감’으로 해석되는 사회에서, 르네상스적인 사고는 때때로 경력 설계의 리스크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마 나는 지식 간 연결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취향이 아니라 인지적 특성, 나아가 존재 방식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매커니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내 생각엔 제한된 관심사는 사회가 요구하는 상품화된 자아의 산물이고, 다양한 호기심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자율적 사고의 표현이다. 대부분은 사회적 수용과 생존을 위해 자기 서사를 단순화하지만, 나는 내적 자유를 향해 확장되는 인지적 구조와 내면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지금, 작은 꼬마 교수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알고 싶고, 모든 것을 연결해 하나의 큰 개념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르네상스 맨을 꿈꾼다. 팔기 위한 인간이 아니라, 사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 카테고리에 갇힌 직업인이 아니라, 세계를 유영하며 의미를 건져 올리는 사람.
그리고 나는 믿는다. 미래는 다기능의 인간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에게 열릴 것이다. 문명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직선으로는 풀 수 없는 곡선의 문제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 곡선을 이해하는 사람은, 가장 넓게, 가장 깊게 세계를 바라보는 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