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이상한 사실을 직감처럼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은 정교한 이해나 계산된 배려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를 흔드는 존재는 상대의 마음 깊은 곳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중심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사람은 타인에게 몰두하지 않는다. 과잉한 관심으로 상대를 조종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기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고유한 리듬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 무심함 속에서 묘한 자족의 기운이 태어난다. 그 안정된 중심, 혹은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호흡이 누군가의 심장을 비틀어 놓는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불편할 만큼 솔직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나 역시 그 범주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관계의 초입에서 나는 유난히 상냥하다. 상대의 말과 표정을 예민하게 읽어내고, 섬세하게 맞춰주며, 나조차도 낯설 만큼 부드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관계의 축이 내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미세하게 물러난다.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는 거리감.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원래 살아오던 리듬과 무심함, 내 방식의 고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변화는 나에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르시시스트인가?’
‘사람을 얻는 과정에서는 열광하면서도, 얻고 나면 흥미가 식는 나는 인성이 잘못된 걸까?’
내 안에는 언제나 두 모습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매력이 통하는 순간에서 어떤 힘을 느끼는 나,
또 하나는 그 힘이 상대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하는 나.
이 두 존재 사이에서 나는 늘 걸어 다녔다. 마치 마음이 두 개 달린 생명체처럼.
그러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조금씩 이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나쁜 남자’의 도식적인 이야기와 다르다.
누군가를 일부러 소비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오히려 나의 관심과 에너지가 본래 비선형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내 중심축이 언제나 내 안쪽을 향해 기울어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해였다.
나는 나를 살아내는 데 너무 익숙했다.
그 익숙함은 때로 누군가에게 매력으로 작용했고,
다른 때에는 차갑고 잔인한 경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양면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도, 타인도 종종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익숙함을 그대로 두고 싶지 않다.
관계란 결국 두 사람이 각자의 궤도를 지닌 채, 서로의 중력까지 고려해야 비로소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나 자신에게 선언한다.
앞으로의 관계에서는
내 중심을 먼저 세우는 방식 대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보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리듬,
그 사람이 지닌 두려움,
그 사람이 흔들리는 지점들을
나는 더 이상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들림을 함께 나누고 그 옆에 서 있으려는 사람이고 싶다.
자기 중심을 지키는 힘과
타인의 중심을 바라보는 윤리.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