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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지능과 고지능 사이에서

by 신성규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는 늘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서로의 닮음 속에서 안정을 찾지만,

어떤 관계들은 서로의 다름 속에서 시작된다.


경계선 지능을 가진 사람이 고지능자에게 마음이 기울 때,

그 마음의 방향은 더더욱 단순히 설명할 수 없다.

그건 존경도, 동경도, 부족함의 보완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감각 —

‘저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덜 흔들린다’라는

조용한 안정의 경험에 가깝다.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빠르고,

너무 큰 소리와 복잡한 규칙을 던져준다.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상황은 지나가고,

감정은 들끓는데 말로 붙잡기 어렵다.

그 순간, 고지능자들은

마치 지도가 손에 쥐어진 사람처럼 움직인다.


그들은 문제의 방향을 순식간에 가늠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감정을 대신 설명해 주며,

혼란의 실타래 속에서 길을 발견한다.


경계선 지능인이 고지능자를 좋아하게 되는 건

이 능력을 이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기울어진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이의 사고가

나의 무질서를 잠시 거두어 가는 순간,

사람은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고지능자는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 깊이가 이해되지 않아도

‘든든하다’는 느낌은 이해된다.

우리는 모두 불안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누군가는 언어 대신 존재로 사람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이 관계에는 조용한 비대칭이 있다.

경계선 지능인은

“저 사람은 나를 정리해주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고지능자는

“나는 왜 이 사람의 감정을 대신 짊어지는가”라고 느끼기도 한다.


모든 상보성은 아름답지만,

모든 아름다움이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진짜였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훼손도 없다.


어쩌면 이 관계의 본질은

서로의 지능 차이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채우고 싶은 인간적 욕망에 있을지 모른다.


경계선 지능인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 세계에서,

누군가에게 조용히 이해되고 싶어 한다.

고지능자는

세상을 지나치게 깊게 보아 버린 탓에,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단순하게 믿음 받고 싶어한다.


이 둘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완전한 이해가 관계의 조건은 아니다.

어떤 관계는,

말로 닿지 않아도

살며시 마음이 기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끌림은

사람이 사람을 필요한 만큼만 이해하고

필요한 만큼만 기대는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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