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하고 지내?”
그 말은 늘 친절한 인사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질문의 말투와 눈빛 사이에는 종종 어떤 질서의 본능이 숨어 있다.
그것은 곧, 통제를 위한 친절, 감시를 위한 관심의 얼굴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상태를 확인하며,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관심’이 상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구조화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따뜻함이 아니다.
그것은 정상이라는 범주의 경계를 수호하려는 집단의 본능, 즉, 이질성을 제거하려는 무의식적 장치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 때 불편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의 자유로운 선택은 곧, 내 선택이 필연적이지 않았음을 증명해버리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보다 떠도는 삶을 택한 사람,
결혼 대신 사유의 자유를 택한 사람,
규칙적인 삶 대신 창조적 리듬을 살아가는 사람.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 그들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집단은 작동한다.
“괜찮아?”라고 묻고,
“그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 어떻게 할 거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은 결국 한 문장으로 환원된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마.”
관심은 종종 걱정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걱정은 실제 도움이 될 정보를 주거나, 정서적 지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개는 삶의 ‘지도’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다.
“이렇게 해야 망하지 않아.”
“이런 건 해줘야 남들이 안 이상하게 봐.”
여기서 ‘남들’은 실존하는 대상이 아니라,
집단적 시선의 대리인,
자신조차 탈출하지 못한 규범의 망령이다.
결국, 관심은 상대의 안녕보다는
자신의 안도감을 위한 감시다.
진짜 두려운 건, 타인의 자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놓친 가능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고,
설명 불가능한 방식으로 살아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는
집단에게는 이질적이고, 두렵고, 때로는 위협적이다.
그 순간, 관심은 칭찬에서 질책으로,
호기심에서 평가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은
“너는 왜 나와 다르냐”는 재판이 된다.
모든 관심이 악의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관심이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이 관심은 나를 위한 것인가,
집단의 안정을 위한 것인가,
혹은 내 자유를 감시하기 위한 정서적 장치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이 ‘경계의 언어’를 갖추어야 한다.
“괜찮아요, 저는 제가 사는 방식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지만, 저는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믿어요.”
관심의 정체를 꿰뚫는 순간,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