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마음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동아시아적 복종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by 신성규

나는 말한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남의 눈치를 볼까?”

“왜 모두가 그렇게 순응적이며, 말 잘 듣는 게 미덕인 것처럼 살아갈까?”

그 질문의 근원은 단순히 사회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생존 양식과 문화, 정치, 교육에 이르기까지 스며든 ‘체계적인 복종의 내면화’ 때문이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땅은 논농사를 기반으로 한 농경사회였다.

논은 혼자서 경작할 수 없다. 물을 대는 관개, 모내기와 수확까지 수십 명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한다.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 협력은 개인의 창의보다 질서와 복종을 우선시했다.


반면, 서양은 밭농사 문화였다. 비만 오면 혼자도 땅을 일굴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자신의 몫을 책임지는 힘’이었고, 그건 곧 자기 결정권이었다.


중국, 한국, 일본은 중앙집권 국가였다. 왕과 황제는 천자의 뜻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이 위계적 구조에서 백성은 ‘복종’함으로써 생존했고, 그것이 곧 도덕이었다.


이 질서는 유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위에 있는 자는 무조건 옳고, 아래에 있는 자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이 단단한 사상적 틀은 학교, 가족, 마을, 국가로 퍼졌다.

복종은 미덕이 되었고, 질문은 불경이 되었다.


허나 서양은 다르다.

질문과 논쟁의 전통.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유구한 그리스 역사에서부터 질문하고 토론하는 문화

심지어 교회 중심기에도 이성과 철학의 맥은 살아 있었다.

근대 이후 시민혁명(프랑스, 미국) 등 통해

권리의식이 강화되었다.


그 질서는 근대에도 형태만 바뀌어 계속된다.

입시제도는 ‘정답이 있는 문제’를 빠르게 잘 푸는 인간을 양산했다.

질문보다 순응, 탐구보다 반복, 창의보다 스펙.


회사에서는 상명하복이 기본이며, 군대식 조직문화는 직장, 학교, 심지어 연애까지 침투했다.

복종은 ‘적응력’이라는 이름으로 칭찬받았고, 자율성은 ‘이기심’이라며 비난받았다.


결국 이것은 개인이 자율적 판단을 하기보단,

“어떻게 보일까?”, “규칙에 맞나?”를 먼저 고려하게 만든다.


니체는 말했다.


“노예 도덕은 복종과 겸손, 인내, 희생을 미덕이라 한다.

그것은 약자의 생존 전략이다.”


이 사상은 놀랍게도 동아시아 문화와 닮아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며 살고,

자신의 욕망보다 질서와 인정 욕구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엇에 복종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질서인가? 아니면 타인의 평가인가?

시스템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그러나 지금, 시스템 바깥에서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왜 복종이 미덕인가?”

“왜 나는 나로서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복종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 고유의 사유 체계를 복원하려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이상해.”

“유난 떠는 거 아냐?”


하지만 바로 그 ‘유난스러움’이,

노예 도덕을 넘어서려는 첫 걸음이 된다.


동아시아의 복종문화는 수천 년의 농업, 정치, 철학, 교육 시스템이 만든 심리적 구조다.

이제는 묻고 기억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

“그 질서는 나의 사고를 자유롭게 하는가, 가두는가?”

자유는 노력에서 오지 않는다.

기억에서 온다.

잊혀진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는 사람들만이,

복종 없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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