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슬픈 천재성

by 신성규

천재는 언제나 고독하다.

하지만 어떤 천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고통이 된다.

비트겐슈타인—그의 이름은 이제 철학사에 거대한 운석처럼 박혀 있지만, 그는 철학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기 위해 철학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하지 못해, 철학 속에 숨었다.


그는 원래 공학도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젊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많았다. 지독히 많았다.

버트런드 러셀을 찾아가 상담을 청했고, 러셀은 시험 삼아 글 한 편을 써보라고 했다. 그 글을 본 러셀은 말했다.

“너는 철학을 해야만 해.”

그 한마디로 천재는 발굴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천재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정신병이라 여겼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깊이 파고들어, 그는 매일같이 괴로웠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신을 믿었다. 자살은 죄였다.

그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전쟁에 자원했다.

죽을 기회를 정당하게 얻기 위해, 그는 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죽고자 했기에, 아이러니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고 돌아왔다.


그 전쟁통에서 그는 책을 썼다.

“논리철학 논고”—불과 몇 십 쪽에 불과한 책은, 철학계를 뒤흔들었다.

그의 결론은 하나였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언어로 세계를 정확히 가리킬 수 있는가를 평생 탐구했다.

그가 보기엔, 언어는 현실을 지시하는 도구였다. “개”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현실 속에 “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힘들다”라는 말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말을 논리적으로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이거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우리는 침묵하게 되지만, 그 침묵은 존재의 울림이다.

마치 칸트가 인간 이성을 제한함으로써 신적인 것들을 보호하려 했듯, 비트겐슈타인도 언어의 한계를 긋고 그 너머의 것을 지키려 했다.


책을 내고 그는 다시 말했다. “철학은 끝났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다시 깨웠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시골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철학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와 쓴 책은 “철학적 탐구”였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 게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안에서 기능하는 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야이 쌍놈들아 밥 처먹으러 왔냐!”

라고 들으면, 우리는 웃으며

“할머니, 오늘은 된장찌개요~”

라고 반응한다.

하지만 똑같은 말을 호텔 레스토랑에서 상견례 도중 들었다면?

그 순간 그 말은 결혼도, 관계도, 인간도 깨뜨린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맥락에서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언어가 우리를 규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말이라는 게임을 하며 살아간다.


말년의 비트겐슈타인은 병을 얻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좋은 소식이 있다네. 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이네.

하지만 나쁜 소식도 있다네. 지금 당장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네.”


죽음조차도 그에겐 철학적 유머였다.

그는 침묵을 말하던 철학자였고, 삶과 죽음 사이의 좁은 틈에서 끝끝내 ‘말할 수 없음’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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