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낳는 방식으로 존재를 택한다면,
내 존재는 아마 손자의 기억 속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 기억은 따뜻할 수도 있고, 흐릿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200년쯤 흐른 뒤 잊힐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고 충분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감정이 있다.
내가 정말로 존재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 없이
잊히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다.
나는 불멸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다.
작품을 낳겠다.
내 정신을 뼛속까지 밀어붙여 남긴 하나의 문장,
하나의 사고, 하나의 세계.
그것이 수백 년 뒤 누군가에게 읽히고, 해석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거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모든 유전자는 기억이다.
눈빛, 말투, 습관처럼 구체적인 요소들이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하지만 그 기억은 단절되기 쉽다.
기억은 세대를 넘을수록 약해진다.
증조부의 냄새, 고조할머니의 목소리 같은 것은
시간이 한 꺼풀만 지나도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육체가 남긴 기억의 수명이
결국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고 느낀다.
사람은 잊고, 세상은 변한다.
내가 직접 목소리로 남기지 않으면
내 영혼은 언제든지 침묵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글은 말보다 오래 산다.
말은 공기 속에서 흩어지지만,
글은 종이 위에, 화면 위에, 기억의 기록 위에 남는다.
나는 내가 죽은 후에도 나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그 묘한 형식을 사랑한다.
그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글은 내가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무형의 정신을 유형으로 끌어내는 마법 같은 행위다.
나는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마음에서 다시 말 걸 수 있게 된다.
창조란, 생물학적 유산을 넘어
개념의 유산을 남기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시간 바깥으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방식 아닐까?
나는 단지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작품을 남긴다는 것은 책임이다.
그 문장이, 그 개념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일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단지 아름다운 문장을 넘어서,
존재의 무게를 견딘 문장을 쓰고 싶다.
내가 한 말, 내가 한 글, 내가 낳은 생각이
시간을 견디고 타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생물학적 삶은 우연이다.
하지만 창작은 선택이다.
나는 선택하고 싶다.
내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식을.
아이 대신 문장을 낳고,
유전 대신 사유를 남기며,
나는 존재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은가?
그 질문만이 이 삶을 본질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