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랭보를 이해한다.
어쩌면, 너무 잘 이해해서 고통스럽다.
세상의 직업들이란 무엇인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표정으로 사람을 마주하고, 말의 절반은 진심이 아닌 체면 위에서 건네지는 구조들.
생산과 유용성이라는 이름의 검은 사슬이, 인간을 조용히 정해진 궤도에 얹어버린다.
거기서 ‘나’는 없다. ‘유능한 누군가’, ‘필요한 사람’은 있어도, ‘존재하는 나’는 없다.
랭보는 그 부재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만둔다. 말도, 시도, 삶의 틀도.
그의 방랑은 탈주였다.
세상이 정한 ‘쓸모의 형태’에서 벗어나,
존재의 날것을 부딪히려는 시도였다.
나 역시 비슷한 갈망을 느낀다.
직업이라는 말이 주는 정체성과 안정성보다,
차라리 혼란과 침묵 속에 있는 어떤 진짜 나.
불안하지만 거짓은 없는 장소.
나는 그것을 원한다.
그곳엔 이름이 없다. 명함도, 직무도, 직위도 없다.
다만 내가 있다. 내가 느끼는 세계가 있고, 내가 도달하고 싶은 언어가 있다.
랭보는 시를 버렸고,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한 나의 언어를 더듬는다.
그는 ‘일찍 늙은 천재’가 되었고, 나는 아직 낡은 세계를 벗지 못한 이방인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처럼 무용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