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설국열차를 통해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그것의 위선적 아름다움을
냉소적으로, 그러나 치밀하게 해부한다.
많은 자본주의 비판은 흔히 수직적 불평등을 논한다.
그러나 봉준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평적 구조 속에서도 평등은 환상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열차는 겉보기엔 하나의 생존 공동체다.
앞과 뒤는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환상이다.
열차는 수평으로 놓여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과 자원 분배는 앞과 뒤로 분리된다.
앞칸은 호화로운 소비와 예술, 교육을 누리고,
뒤칸은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살을 태운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은유다.
표면상 모두 같은 플랫폼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출발선 자체가 다르고, 도달 가능한 목적지도 구분되어 있다.
주인공은 열차의 ‘앞’을 향해 전진한다.
그는 그 여정을 ‘혁명’이라 믿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진실에 다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끝에서 만난 것은
또 다른 체제 관리자—윌포드다.
결국 열차의 맨 앞이나 맨 뒤나,
모두 체제 안에 존재할 뿐이다.
커티스가 갈망했던 ‘해방’은
단지 위치의 변화이지, 존재의 변화는 아니었다.
가장 잔혹한 장면은
기계 속에 들어간 아이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작동 원리를 드러낸다.
체제는 끊임없이 아이를 집어삼키며,
자신의 유지 수단으로 인간을 소비한다.
이 아이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이 장면은 봉준호가 단순히 체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체제를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재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결국 열차는 폭발한다.
눈표범이 나타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진정한 생명, 진정한 자유는
열차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
봉준호는 말한다.
“너희가 갈망하는 평등은 이 구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혁명은 기차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기차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설국열차는 단지 불평등을 고발하지 않는다.
그는 구조 자체의 허구성,
그 구조가 ‘진보’, ‘진화’, ‘질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쉽게 인간을 가두는지 보여준다.
그는 열차를 만들고, 그 위에 인류를 태운 다음,
마지막에 그것을 파괴한다.
그 속에서 태어난 눈표범—생명과 가능성—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