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 네 개의 이야기.
그중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라쇼몽은 진실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은 왜 자신의 진실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한 명의 무사, 그의 아내, 산적, 그리고 죽은 자.
모두 동일한 사건. 강간과 살인을 말하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산적은 자신이 정정당당한 결투 끝에 이겼다고 말하고,
아내는 수치심과 절망으로 남편이 자신을 죽였다고 하며,
남편의 영혼은 타인의 말로 복수를 이야기한다.
목격자는 또 다른 제3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 네 개의 진술은 모두 가능한 진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후 심리학에서 라쇼몽 효과로 불릴 만큼,
기억과 인식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보여준다.
사람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 감정, 도덕성, 자기 이미지를 투사하여 본다.
결과적으로,
진실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의 총합 속에서 구성된다.
이 영화가 무서운 건
사실의 왜곡보다
그 왜곡이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산적은 용감하게 보이고 싶어 왜곡한다.
여자는 피해자이자 조종자로 기억을 편집한다.
죽은 자조차도 죽은 뒤에조차 자신을 합리화한다.
결국 구로사와는 말한다.
“진실을 보지 말고, 인간을 보라.”
영화는 라쇼몽이라는 버려진 문 아래서
한 남자가 버려진 아기를 데려가며 끝난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거짓말을 하던 이 세계에서
단 하나의 작은 선행이 등장한다.
이는 질문이다.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우리의 인간성은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묻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가를 말한다.
진실은 하나지만, 인간은 여럿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유예되고,
그 틈 사이에서 인간이 드러난다.
우리도 지금, 라쇼몽적 사회에 살고 있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 특히 SNS는
이 구조를 디지털 스케일로 확대한 것이다.
같은 뉴스 기사도
트위터에서는 조롱,
인스타그램에서는 감성,
유튜브에서는 음모론으로 재가공된다.
유튜버, 인플루언서, 커뮤니티 이용자들 모두
“자신만의 진실”을 만들어 유포한다.
누구도 완전히 틀리지 않았지만,
서로는 서로를 거짓이라 부른다.
라쇼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알고리즘은 라쇼몽을 증폭시킨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보고 싶은 해석’을 계속 보여준다.
이로 인해
진실은 더 이상 공유되지 않고,
자기 확증적 정보만 강화되며,
사회는 ‘해석 공동체’로 분열되곤 한다.
즉 ‘내가 믿고 싶은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가 라쇼몽적 사회로 환원된다.
사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해석들 사이에서 분열된다.
결국, 진실은 감정이 되고,
사실은 서사의 재료로만 남는다.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당신이 어떤 사건을 보았을 때,
그 감정은 어디서 왔을까?
누구의 말을 믿고 싶은 건, 왜일까?
지금 이 사회는
‘사실’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나의 감정에 더 잘 맞는지가 중요하다.
진실은 더 이상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이 되어버렸기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쇼몽은 말한다.
진실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남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걸 의심하라는 것도,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음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나는 왜 이 해석을 믿고 싶은가?”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분노는 진실에 반응하는가, 아니면 내 감정에 반응하는가?”
‘라쇼몽적 사회’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고,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며,
무엇보다도 이야기 뒤의 사람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어쩌면 모두가 떠드는 이 사회에서,
침묵하고 듣는 이가 더 깊은 진실에 닿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