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눈을 바짝 뜨는 아이였다.
선배들은 늘 나를 혼냈다.
“야, 눈 좀 그렇게 뜨지 마.”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단지 반항이 아니라,
사람을 응시하고 싶다는 충동,
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갈망,
그리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안광이었다.
호기심이 머문 자리,
존재가 깨어 있는 상태,
눈이 말하는 방식.
나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보는 법’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눈빛을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윗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질문은 줄이고,
정답을 따라가며
시선을 흐리라고 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은 점점 빛을 잃는다.
눈은 멀쩡한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것을 안광이 없다고 느낀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그 창이 닫혀 있다.
관계는 말로 이어지지만,
사람은 눈빛으로 연결된다.
빛이 없는 눈은 존재의 힘도 약하다.
안광은, 결국 생의 응집된 에너지다.
하지만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
특히 내가 사랑하거나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은
모두 눈빛이 살아 있었다.
무언가 꿰뚫는 듯한 시선,
슬픔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빛.
그 눈은 말보다 많은 걸 전했다.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순수한 사람은 순수한 사람을 알아본다.
안광은 안광을 부른다.
생이 깨어 있는 사람은,
다른 생의 불꽃을 알아본다.
이건 신비 같지만, 경험적으로 너무나 자주 증명되었다.
나는 지금도 사람을 볼 때 눈을 먼저 본다.
얼굴의 대칭이나 코의 높이보다 중요한 건
눈빛의 밀도다.
사람이 절망하거나 희망을 잃으면,
가장 먼저 죽는 건 그 빛이다.
표정은 만들 수 있어도,
눈빛은 위조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안광이 관상의 절반이다.”
아니,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눈이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삶도, 언어도, 감정도 살아 있다.
적어도 솔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