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의 저녁은 ‘시트콤’으로 끝났다.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 드라마들은 단지 웃기려고만 했다.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울리려 하지 않았고, 분노를 유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소소하게, 가볍게, 순수하게 웃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드라마는 다르다.
웃기지 않는다.
대신 울게 한다.
혹은 화나게 한다.
불행한 가족, 갑질 상사, 학폭, 외도, 죽음, 복수, 눈물, 감정 폭발.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진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미 대신 감정 조작을 소비하게 되었는가?
최근의 한국 드라마는 감정 과잉이라는 병에 걸렸다.
등장인물은 과하게 고통받고, 시청자는 과하게 감정이입을 강요당한다.
불행해야 공감받고, 울어야 진짜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구조는 정서 착취에 가깝다.
“분노하라고 하니까 분노하고”
“울라고 하니까 운다”
“공감하라고 하니까 눈물 흘린다“
이건 자율적 감정이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감정 반응이다.
더 이상 내가 웃고 싶어서 웃는 게 아니다.
미디어가 슬프라니까 슬픈 것이다.
시트콤은 단순히 ‘가벼운 웃음’을 제공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사회 분위기에서만 가능하다.
한국 사회는 점점 더 팍팍해졌고,
사람들은 가볍게 웃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시트콤은 사라졌다.
웃을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그 틈을 감정 납치극으로 채워버렸다.
우리는 다시 아무 의미 없이 웃는 순간들이 필요하다.
철딱서니 없는 동생과 답답한 아빠,
사소한 오해와 엉뚱한 행동,
“밥 먹었어?“로 시작되는 티격태격.
그 안에는 복수도 없고, 죽음도 없고, 눈물도 없다.
하지만 있다.
사람이 있고, 호흡이 있고, 일상이 있다.
시트콤은 민주적 장르다
시트콤은 거창한 주제를 말하지 않는다.
누구든 이해할 수 있고,
누구든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권력 없는 웃음이다.
누구를 깎아내리지 않고
누구를 희생시키지도 않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웃을 수 있는 방식이다
이런 장르는 지금의 분열된 사회에 더 절실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웃음의 구조 자체를 잃고 있다.
웃으려면 반드시 ‘조작된 분노’나 ‘감정의 고통’을 통과해야만 한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울지 않아도 괜찮다.
분노하지 않아도 감정이 있다.
가볍게 웃는 것도 ‘감정’이다.
시트콤은 그걸 기억하게 만든다.
우리는 시트콤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