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를 보며 철학

by 신성규

도시의 골목 어귀에서, 종이 박스를 쌓아 리어카에 옮기는 노인을 본다.

그 장면은 어느덧 도시의 배경이 되었고, 더 이상 특별한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왜 나는 폐지를 낭비로만 느껴왔을까?


그러나 어느 날, 그 시선을 전복시키는 사유가 떠올랐다.

“혹시 폐지란, 도시가 만들어낸 비공식 복지 형태는 아닐까?”


우리는 폐지를 ‘쓸모없어진 것’으로 분류한다.

그것은 유통의 끝, 소비의 찌꺼기, 자본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퇴물이다.

그러나 폐지를 수거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수입’이고,

그들의 노동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복지 시스템이다.


생각해보자.

누가 폐지를 줍는가?

주로 고령자, 빈곤계층, 혹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사회적 고용 계약도 없이, 자기 노동을 기반으로 생존을 시도하고 있다.

폐지는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도시가 배출한 자원을 통해 다시 생존을 설계하는 방식이자,

비공식적인 복지 생태계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포장하고, 소비하게 하고, 버리게 만든다.

그 결과 엄청난 양의 폐지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폐지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열심히 ‘자원화’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그 누구도 고용하지 않은 이들, ‘사라진 시민들’이다.


이들은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복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대체 구조다.

즉, 폐지는 실패한 복지의 부산물이자,

동시에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폐지를 통해 얻는 수입은 미미하다.

그러나 그 미미함이야말로 중요한 신호다.

극도로 분산된 자본, 분산된 노동, 분산된 생존.

폐지는 ‘약자 중심 분산 복지’의 초기 형태처럼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늘 공식적인 복지 시스템만을 복지로 인식한다.

정부의 보조금, 지자체의 지원, 고용 정책.

하지만 그 이면에서, 스스로를 돌보는 수많은 ‘비공식 복지 시도’는 존재하고 있다.


폐지 수거는 그 중 하나다.

도시는 매일 쓰레기를 배출하고,

그 쓰레기를 생존의 자원으로 되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을 부끄러운 존재, 감춰야 할 장면으로만 여겼을까?


이 질문은 곧, 복지의 미학적 기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보기 좋은 복지’만이 복지인가?

‘서류 위에 존재하는 복지’만이 복지인가?

아니다.

쓰레기통 옆, 박스 옆, 리어카 위에도 복지는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폐지는 쓰레기인가, 자원인가?

폐지 줍는 이는 무능한 빈자인가, 생태-복지의 실천자인가?

우리는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가, 혹은 함께 설계해야 하는가?


답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있다.


폐지는 도시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장 낮은 형태의 분산형 복지 자산이다.


우리는 그것을 낭비로만 간주하며,

그 안에서 존엄하게 생존하는 이들의 ‘기여’를 보지 못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폐지를 자원으로 보는 동시에,

그 자원을 수거하는 이들을 복지 실천자로 재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확장 가능한 구조로 설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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