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값에 가두는 집단주의의 얼굴

by 신성규

대한민국에서 천재들은 흔히 ‘음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성격이나 표정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평균적인 사회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불안은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동아시아적 집단주의에서 비롯된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조화’를 중시한다. 튀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그리고 평균에 맞춰 사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이는 곧 ‘질서’와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재는 그 질서 바깥에 서는 존재다. 그는 타인의 생각을 의식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깊게 파고들어 세상의 본질을 탐색하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집단의 규범을 깨뜨리는 ‘괴물’처럼 보인다.


천재들이 ‘음침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평균값 바깥에 위치한 존재가 불러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균을 벗어난 이들을 잠재적 위험요소로 간주한다. “왜 저 사람은 나와 다를까?”라는 질문이 의식 저편에서 불안을 일으키면, 그것은 쉽게 “저 사람은 이상하다”라는 낙인으로 번역된다. 두려움은 시기와 질투를 낳고, 그 감정은 다시 ‘싹을 잘라야겠다’는 억제 충동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천재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잘라내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이는 사회 전체가 ‘평균’을 유지하려는 방어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균값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때, 천재는 그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한다. 그 순간, 사회는 자신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그를 ‘음침하다’고 말하며 한발 물러서게 만든다.


나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 사회는 뛰어난 재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라, 그것을 두려워하며 질서를 유지하려 드는 구조물처럼 보인다. 천재는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품은 가능성을 ‘음침하다’는 말로 억누르는 대신, 그 다름을 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사회가 평균값을 넘어설 수 있을 때, 그때 진정한 창의성과 혁신이 꽃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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