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다르다고 믿는다.
법률은 세련되어지고,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우리는 ‘야만’에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심리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 희생, 배제, 숭배, 지배라는
원형적 감정의 구조 안에 살아가고 있다.
신화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언어와 제도, 도구의 형태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
신화는 구조다. 그리고 구조는 반복된다.
우리가 신화를 잊었다고 해서,
신화가 우리를 떠난 것은 아니다.
과거의 희생제의는 지금도 존재한다.
학교폭력, 군대 문화, 조직의 생존 게임은
사회적 ‘피의례’를 재현한다.
영웅 신화는 지금도 반복된다.
스타트업 창업자, 셀럽, 정치적 지도자에게
우리는 ‘구원’을 투사한다.
금기는 형태만 바뀌었다.
과거의 신성불가침은 이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덕적 금기로 재현된다.
이 모든 반복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법률이 더 정교해졌지만, 인간의 본능은 여전히 신화를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
이 지점에서, 타 문화를 멸시하는 태도는
근본적 자기 무지에서 비롯된다.
어떤 문화를 ‘낙후되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실은 “나는 나의 신화를 모르고 있다”는 고백이다.
특정 사회의 의례가 우리에겐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공동체를 묶는 심리적 구조가 숨어 있다.
우리가 ‘진보적’이라 믿는 제도나 행위도,
그 뿌리를 보면 동일한 신화적 코드의 현대적 표상일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의 애국주의는 국가신화이며,
한국의 대학입시는 ‘희생을 통한 구원’의 종교적 서사다.
일본의 예의범절은 공동체 신화의 정교한 형태이며,
유럽의 개인주의는 ‘자기신성화’의 르네상스적 신화다.
따라서 타문화를 조롱하는 것은, 자기 신화를 망각한 채 타인의 신화만을 읽으려는 오만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타문화를 단순히 관찰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심리적 구조, 반복되는 서사, 상징적 코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윤리를 요구한다:
차이의 존중: 단지 ‘다름’이 아니라, 그 안의 ‘반복’ 구조를 인식
자기 신화의 비판: 내가 속한 세계의 신화를 인식하고 질문
신화의 재서사화: 타인의 신화를 무시하지 않고,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인간은 신화를 만든 존재이지만, 동시에 신화에 사로잡힌 존재다.
우리가 다른 문화, 다른 공동체, 다른 역사적 경험을 마주할 때
그 속에서 ‘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반복하고 있는 무엇’을 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오만할 수 없다.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서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철학적인 겸허함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