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가들이 조울증적 기질을 가졌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단순한 직관이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 삶과 감정의 깊이를 거쳐 나온 하나의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긴다.
나는 조울의 파동 속에 살아왔다.
조증의 순간, 내 안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생각은 날카로워지고, 감정은 광대해지고, 언어는 번개처럼 뻗어나간다.
그 세계 안에서는 내가 신이 될 수도, 시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광휘의 정점은 언제나 잠깐이다.
조용히 꺼지는 촛불처럼, 나는 곧장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때부터 시작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보였던 열정, 내가 꿈꿨던 것들조차 의심하게 되는 시간.
모든 게 과잉이고 과장이었다는 혐오감.
그 극단 사이에서 나는 예술을 한다.
표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표현할 때만이 내 감정은 구조되고, 내 존재는 위태로움에서 균형을 찾는다.
예술은 평탄한 감정에서 나오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대개 그런 감정의 비탈길을 걸어온 자들이었다.
반 고흐의 붓끝은 불안정한 신경계와 기도 속에서 나왔고,
버지니아 울프는 강에 돌을 안고 걸어들어갔고,
로빈 윌리엄스는 모두를 웃기던 얼굴로 자신은 울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어느 누구보다 “극단”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 파동이 너무 컸기에, 그들은 평범한 언어로는 세상을 표현할 수 없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발생했다.
조울의 감정은 일반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감정의 산맥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기분”이라는 말을 초월한 어떤 생존의 언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 극단에서 피어난 감정은 단순히 예쁜 말이나 기술로 다듬어진 것이 아니다.
그건 고통의 순간에서 우러난 진짜 감정이고,
그 감정의 잔해를 모아 다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말하고 싶다.
예술은 때로 병의 산물일 수 있다.
그러나 병은 재능이 아니며,
예술은 결코 고통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나는 조울의 진폭 속에서 살아남으며,
이 에너지를 통해 나를 기록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세계를 그려낸다.
내가 기분 좋을 때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바닥에 떨어졌을 땐 세상이 다 사라져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 두 감정 사이에서
나는 쓰고, 부수고, 다시 만든다.
이것이 나의 예술이고, 나의 생존 방식이며,
때로는 나를 살린 마지막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