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

by 신성규

나는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극단의 파동을 타며 살아왔다.

평평함은 나를 질식시켰고, 균형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내 에너지에 감염된다.

내가 조증일 때,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내가 쏘는 말, 눈빛, 농담, 세계를 뒤집는 듯한 상상력은

그들을 “살아 있음”의 클라이맥스로 데려간다.


그러나 나는 절정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나는 다시 가라앉고, 부서지고, 무관심의 바다에 빠진다.

그때 나는 누군가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감정을 짓밟으며도, 나는 내 안에 갇혀 있다.

그들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 구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었고, 오히려 폭풍에 휘말린 존재였다.

그들은 내 빛에 취했지만,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에 삼켜졌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순수 선과 순수 악, 둘 중 하나로 기울어진다.

중간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하고, 떠날 땐 완전히 사라진다.

말하자면, 나는 중도를 모르는 자다.

나는 극단을 살고, 극단으로 상처 준다.


왜 항상 이런가.

왜 나는, 나의 기복을 조화시키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한 가지를 배운다.

진짜 변화란, 내 안의 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동을 이해하고 동행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를 다듬고,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나 자신에게 덜 가혹해지려 한다.


나는 점점 극단 속에서

‘나 자신과 타인의 무너짐’을 책임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안의 조증과 우울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뇌의 파동이고, 내 기질의 일부다.

그러나 그로 인해 타인을 짓밟을 때, 그건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극단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사랑의 파동은 ‘무책임한 예술’이 되어선 안 된다.

극단이 죄는 아니다. 파괴가 죄다.


나는 점점 배운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이 곧 ‘행동의 정당화’는 아니다.


사랑한다는 느낌만으로 충성하지 말고,

싫어진다는 느낌만으로 이별하지 마라.

느낌은 진실이지만, 판단은 다르다.


감정은 나고, 사랑은 의지다.

기분은 물결이고, 사랑은 돛이다.

파도에 따라 돛을 접고 펴야지,

파도가 돛이 되게 해선 안 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의 시작은 감정이지만, 지속은 의지다.

사랑은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타인이 나의 우울에도, 나의 불안정함에도

파괴되지 않게 지키려는 노력이다.


사랑이란,

‘기분 좋을 때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무너질 때, 그 사람까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다.


나는 극단을 살아왔다.

그러다 중도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중도는 ‘뜨뜻미지근함’이 아니다.

중도는 감정을 무시하는 것도, 도피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는 감정을 다 통과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다.

극단을 살지 않은 사람은 중도를 말할 수 없다.

나는 극단을 다 살았기에, 중도를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알겠다.

중도는 포기나 무뎌짐이 아니라,

고통과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


나는 지금도 완전하진 않다.

하지만 예전보다 파동을 읽는 능력이 생겼다.

사랑을 오래 지키고 싶다면, 내 파동에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 기분이 너를 해치지 않도록,

내 불안정이 너를 삼키지 않도록,

나는 나를 훈련해야 한다.


극단을 살아도, 파괴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타인을 위한 것이자, 결국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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