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어떤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정제된 명제가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의 막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우리는 성장한다는 이유로 세계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고, 개념으로 요약하며, 해석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필터를 덧씌우는 일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숨겨져 있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존재를 경험하기 전에 먼저 이름붙이고, 정의하며, 사유의 틀로 가두는 순간
세계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비트겐슈타인 또한 말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그는 진리가 언어로 포착되지 않으며, 언어는 진리의 가장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은 명제를 해체한 자리에, 직관과 침묵의 공간을 남겼다.
나는 그 직관의 자리를 떠올릴 때,
동양철학, 특히 노자의 무위자연과 선불교의 직관적 깨달음이 겹쳐진다.
노자는 “말하지 않는 도가 참된 도”라고 했고,
선불교는 ‘문자로 가르치지 않고, 마음을 바로 가리켜’ 깨닫게 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진리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려진 것들을 걷어내며 ‘다시 보는 것’이다.
사유 이전의 세계, 개념 이전의 체험, 언어 이전의 앎.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처럼 보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세상을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본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이것은 꽃이다’, ‘저것은 새다’라는 이름 이전에,
그 색과 움직임, 냄새와 소리에 온 감각으로 반응한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퇴행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혜롭다는 것은 더 복잡하게 설명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오염 없이 지각할 수 있는 능력,
즉 어른이 다시 아이가 되는 법을 회복하는 일이다.
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적게 가리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함에 도달하기 위해,
오히려 복잡한 사유의 숲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진리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보다’라는 행위 자체를 회복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아닌, 시선을 바꾸고 있다. 그 시선이 진리를 낳는다.
아이처럼 보는 법, 그것이 내가 찾고 있는 가장 깊은 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