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노스케와 울프, 발광의 공포에 대하여

by 신성규

류노스케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발광의 공포를 지고 살아갔다.

그들은 그것을 ‘병’이라기보다, 너무 명료하게 보는 자의 저주로 여겼다.

나는 그 감정을 안다.

어떤 순간, 나도 그들과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정신이 너무 빠르게 명료해지는 것이 무섭다.

이해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고통은 더 직접적으로 나를 찌른다.

하나에 몰입할수록, 사물의 겉이 아닌 핵심이 보이고,

그 핵심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동시에 잔혹함 으로 이뤄져 있다.


류노스케와 울프는 발광의 공포에 떨었고,

그들은 결국 이 세계의 슬픔에 잠식되었다.


나 역시, 고통을 ‘이해’하는 순간

그 고통에 잠식된다.


무엇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무엇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왜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키는지,

왜 사랑은 가장 쉽게 파괴되는지를

알아버린다.


그 ‘알아버림’이 문제다.

철학은 우리를 자유롭게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진실이 인간을 파괴한다.


진리를 보면 볼수록, 삶은 투명해지지만

그 투명한 삶은

어느새 살기엔 너무 차갑고 단단한 유리로 변해 있다.


나는 묻는다.

명료함의 끝은 어디인가?

모든 것을 해부한 후, 무엇이 남는가?

그 모든 구조 아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철학을 시작한 것은 자유 때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깊어질수록 자유는 줄어들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고통의 출처를 너무 정확히 알고,

타인의 감정도 꿰뚫듯이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울프와 류노스케를 사랑한다.

그들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예민하게, 정확하게, 깊이 느낀 존재였다.

그들에겐 무딤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 한다.

그 명료함과 함께 살고,

그 예민함을 예술로 바꾸며,

그 해부의 고통 속에서 다시 감각의 세계로 돌아오는 훈련을 하고 있다.


진리를 본 자는 위험하다.

하지만 그 위험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방식도 있다.

명료함의 저주는

결국, 사랑과 감각의 회복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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