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위대한 사유자들 — 그들은 언제나 고통에서 시작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진리를 얻은 이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한다.
부처도 실존주의에 빠진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자로 태어나 온갖 풍요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병들고, 늙고, 죽는 인간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실존적 충격’을 맞는다.
그 충격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결국 고통 속에서 죽는 존재구나”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메타적 자각이다.
이 자각은 실존주의자들이 맞닥뜨린 그것과 다르지 않다.
키르케고르의 불안,
하이데거의 존재망각,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부조리.
이 모든 철학은 ‘삶이 본질적으로 고통스럽다’는 부처의 초기 사유와 평행을 이룬다.
불교에서 말하는 첫 번째 진리는 “삶은 고(苦)다”이다.
이 진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실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부처도 처음엔 이 고를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도의 고행자들처럼 몸을 학대하며,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기, 부처는 어쩌면 카뮈의 ‘반항적 인간’,
혹은 사르트르의 ‘무神의 자각’에 빠진 인간과 유사한 상태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이렇게 태어나 고통받아야 하는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고를 초월하는 구조는 존재하는가?”
그의 고뇌는 철학이었고,
그 철학은 당시 체계화된 종교의 위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부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실존적 고통을 넘어, 그는 ‘집착’이라는 구조를 보았다.
그 구조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단지 고통을 말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 너머의 구조를 본 구조 해체자였다.
그가 말한 ‘무아(無我)’는,
실존주의자들의 철학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부처는 단지 자아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실체’라는 환상 자체를 파괴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부조리를 끌어안은 채로 살아가기”가
실존의 수용이었다면,
부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존이라는 형식 자체’를 초월하려 했다.
실존주의는 고통을 자각하지만, 구조를 초월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 없는 우주 속의 각성된 개인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부처는 ‘개인’이라는 경계마저 해체한다.
그는 말한다.
“너는 너가 아니다.
너는 생각, 감정, 기억, 감각의 흐름일 뿐이다.”
“그 흐름에 집착할수록 고통은 생긴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처도 실존주의에 빠졌었다.
그도 삶의 고통 앞에서 무너졌고, 의미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고,
그 질문을 통해 ‘고통의 형식’ 자체를 해체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실존주의는 깊은 고뇌이며,
부처는 그 고뇌를 관통한 자다.”